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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유럽에서 활동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관 황기환 29 유럽에서 황기환은 선전활동 뿐 아 니라 외교적인 일체 활동을 혼자 감당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때마다 그는 절제된 말과 글로 인권과 정의를 강조 하며 한국인에 대한 정당한 대우와 독 립을 주장했다. 이처럼 일본에 의한 직 간접적 압박을 유럽에서 몸소 겪은 황 기환은 1921년 6월 구미위원부 명의 로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한국 인의 호소(The appeal of the korean people for liberation from japan)』를 발표하였다. 이후 영국에서 파리로 돌아온 황기환은 프랑스 한 국친우회 결성을 도왔다. 1921년 6월 23일 파리 사 회박물관에서 한국친우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루 이 마랭(Louis Marin)의 주재로 시작된 회의에는 프 랑스의 정치인과 문인 등이 참석했다. 루이 마랭은 “3000만의 인구를 가진 불행한 나라 한국이 고통을 받고 있으며 정의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역설하면 서 “한국친우회는 한국민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목 적을 갖고 있다”는 정관을 읽었다. 당시 회의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어에 매우 서툰 한 한국인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192l년 7월 7 일 내무부 제3048호: 한국친우회 창립모임에 관 한 보고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23권) 영국 한국친우회는 프랑스 한국친우회가 만들어 지는 촉매가 되었으며, 그 곳 모두에 황기환이 있었 다. 그러나 구미위원부의 내부 사정으로 유럽사무 소 운영이 어려워지고, 미국 활동이 주력화되면서 황기 환은 1921년 8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에서 다시 고군분투하던 황기환은 1923년 4월 뉴욕에서 불꽃 같은 삶을 마감했다. 그리고 2023년 4월 1백년만에 그의 유해가 고국으로 봉환되었다. 뉴욕 마운트올리벳 묘지에 있던 황기환 지사 묘소(연합뉴스 제공). 필자 황선익 현재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교수로 한국독립운동사, 해외 한인사회사 등을 연 구 · 교육하고 있다. 서울시 문화재위원,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 국립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 운영자문위원 등도 맡고 있다. 주요 논저로 「이봉창 의거에 대한 국외 한인사회의 반향」,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운동자 예우와 순국선열 기 념」, 「한국광복군의 병력증강과 지대 개편」, 『響き合う東アジア史』(東京大學 出 版會, 東京, 201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