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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85 1908년에는 각 교구의 성화실 내에 야간교리강습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게 했으며 1909년에는 기존 의 교리공부 외에 교육을 담당하는 법과를 신설했다. 교리강습소는 근대적인 지식과 민족의식을 고 취시켜 3.1 운동 때 천도교인들이 투쟁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배경이 됐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후에는 세계질서의 재편이 있으리라 예상하고 노령, 만주, 중국, 미 주의 독립항쟁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조선총독부의 천도교인 회유공작에 맞서 손병희와 힘을 합하여 한국의 문화와 윤리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했다. 독립만세운동의 전개와 순국 2월 20일 권동진으로부터 “지금 파리강화회의 에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하여 종래 속국으 로 있었던 나라들을 독립·자치케 한다는 소식 이 있으니, 국권 회복을 희망하는 한국인도 민족 자결의 원칙에 따라 독립선언을 할 것”이라는 이 야기를 들었다. 선생은 보성전문학교 교장 윤익선과 전라남 도 화순에 사람을 파견하여 독립만세운동 계획 을 알렸다. 2월 27일 손병희, 이종일, 이종훈 등 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했고 3월 1일 오후 2 시 태화관에서 개최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였 다. 선생은 그곳에 참석한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 립만세를 외쳤고 독립선언 직후 출동한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 양한묵 선생은 심문과정에서 “이번 거사로 독립되지 않을 수도 있으나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한국 인의 의무이며 기회만 있으면 독립항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독립 후 어떤 권력이나 지위를 획득하려는 야망도 없고 단지 한국인이므로 독립항쟁에 참여한 것이며 독립 후에는 전과 같이 천도 교의 포교활동에 전념할 것”이라고도 이야기했다. 이러한 양한묵 선생의 당당한 답변은 더욱 가혹한 일경의 고문을 불러왔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56세의 노인이 고문을 감당하기는 무리였다. 선생은 1919년 5월 26일 서대문감옥에서 길지 않은 인 생을 마감하고 환원하였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한 옥중순국이었다. 양한묵 선생의 심문조서 양한묵 선생 유해 반장 보도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