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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로 고통받는 백성의 실상을 목격하고, 나라를 구할 방책이 무엇인지 모색했다. 중국과 일본을 주유하다 동학에 입교하다 양한묵 선생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농민과 천민들이 정신 구원과 세상 개혁을 위해 동학에 입교하 는 것을 목격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사형을 당할뻔한 무수한 동학농민군을 구출했다. 1897년 중국의 북경, 천진, 산동 등지를 돌고 1898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세계열강의 정치·경 제·사회·문화를 알아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조희연, 권동진, 오세창 등과 만났고 이들의 소개로 선생은 동학의 교주 손병희를 만났다. 당시 손병희는 일본에서 동학 자제 24명을 교토 부립제1중학교에서 공부하게 하며 동학의 근대화 를 추진하고 있었다. 양한묵은 손병희와 교류하며 손병희의 개화사상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 고 1904년 동학에 입교했다. 이후 황무지개척권 양여요구 반대, 공진회 참가, 임헌군주정을 위한 헌정 연구 등의 독립항쟁과 손병희와 동학의 근대화를 위해 천도교 활동에 전념하던 선생은 이재명 등의 이완용 저격 미수 사건 으로 체포된다. 일본 경찰은 이 일이 선생의 지시로 일어났다고 생각해서다.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 었으나 선생은 4개월의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천도교 교리서의 편찬과 근대화 활동 양한묵 선생은 손병희를 도와 동학을 천도교로 변경하고 천도교의 근대화운 동을 추진함과 동시에 1905년 말 「천도 교대헌」을 작성했다. 1906년 초에 귀국 한 선생은 천도교의 교리를 정비하는 활 동을 했다. 다양한 천도교 교리서를 편 찬하며 사람과 한울과의 관계를 밝히 고 , 동학의 교리를 현대문명에 맞게 정 리했다. 동시에 교리강습소 교육 장려로 천도교인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지방교구에 “종교가 흥왕하는 시 대를 맞이해 교인의 정성과 면목이 진리에 몽매하면 교인자격에 큰 흠절이라. 학교를 설립하여 신리 학과 인계학을 아울러 가르치라”는 명령을 내려 보냈다. 일본에 있던 시절 손병희 선생 등과 같이 촬영한 천도교 간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