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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81 정도이니 얼마만큼 의지가 강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병인양요가 있던 1866년 정시 문과에서 장원 급제를 했고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병조좌랑·사간원 정언 등의 주요 관직을 역임했다.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1876년, 선생은 최익현이 개항을 반대하여 올린 상소를 두둔하다가 파직되 고 만다. 얼마 뒤 복직됐지만, 1882년 한미수호조약으로 나라가 혼란하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조정은 선생을 공조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했으나 사양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벼슬길에 오르겠다는 생각을 아예 접고 고향에 백동서당을 지어 후 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몰두했다. 선생의 이름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이 많아 백동서당에 다닌 선생의 제자가 209명이었다고 한다. 예안 선성의병 대장이 되다 1894년 갑오년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해 개혁이란 이름 하에 친일내각을 세워 왕권을 농락한 갑오개혁이 터진다. 이어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세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청일전쟁을 일으 켜 나라 안은 혼돈의 도가니 속이었다. 7월 14일 이만도 선생은 서상철이 제천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았다. 편지의 내용은 7월 25일에 안 동부의 향교 명륜당에 모여 적의 무리를 토벌하려고 하니 날짜를 약속해 달라는 것이었다. 7월 20일에는 서상철이 직접 예안향교로 찾아와 선생에게 의병을 일으키자고 말했다. 하지만 선 생은 왕의 공식 명령없이 군사를 모집하기를 망설였다. 서상철은 다른 사람과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 키고 일본군 병참부대가 있던 상주 함창의 태봉을 공격했다. 서상철이 한창 의병으로 활동하던 9월, 이만도 선생에게 소모관 이용호가 의병을 일으키라는 왕의 밀령을 가지고 왔다. 망설일 필요가 없어 의병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용호가 일본군에 붙잡혔고 서상 철도 패하여 충청도 청풍으로 후퇴하는 바람에 뜻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일월산 자락으로 은거한 선생에게 을미사변과 단발령 소식이 들려왔다. 안동과 예안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선성의진을 일으키고 을사오적 처형 요구 상소 이만도 선생은 곧 의병을 일으켰다. 동생 이만규도, 아들 이중업도 함께 나섰다. 1896년 1월 23일 선성의진이 결성됐다. 그동안 의병을 일으키지 못 했던 일을 자책했던 것인지 다른 의병에 비하면 매우 빠르게 준비를 완료했다. 하지만 선성의진을 구성하자마자 안동의진이 패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대단한 규모를 가졌던 안동의진이 패했다는 소식은 선성의진 의병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선생은 동요를 막으려 했 지만, 의병들이 흩여져 결성 9일 만에 선성의진은 해체되고 말았다. 그 대신인지 집안 후손들이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