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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024년 10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특집 ‘대한제국기 구국계몽운동의 재조명’ 음과 같이 널리 알렸다. “사회의 가장 하층인 물장수들도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여 문명 진보를 위한 교육에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들은 생계 대책이 막연하고 생활상 여유도 거의 없지만, 향학열은 어느 계층보다도 높다. 반면 일반인의 자제들은 학업에 종사할 생각 없이 무익한 생활로 시간을 허비하니 부끄럽지 않는가. 일명 물 장수야학은 우리 사회의 “귀감”이니, 이 소식을 듣는 즉시 보통 지식이라도 발달시켜 개인의 자유는 물론 이요 국가 자립을 위한 분발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리하여 물장수야학은 자강운동기 ‘대표적인’ 야 학으로 널리 알려졌다. 서북학회 회장 오상규는 서 북협성학교와 물장수야학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 전후로 노동야학이나 국문야학 등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되는 등 야학운동 발흥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국채보상운동 참여로 운명공동체임을 인식하다 1907년 1월에 대구광문사 특별회에서 사장 김광 제(金光濟)와 부사장 서상돈(徐相燉) 발의로 국채(國 債)보상운동의 포문을 열었다. 당시 신문은 경쟁적 으로 역사적인 소식을 알리며 ‘시대적인 사명감’으 로 인식하는 분위기였다. 지역사회 활동가들은 자발 적인 참여를 위한 「취지서」 발표와 조직적인 모금을 위해 국채보상소를 조직했다. 신분이나 지위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는 모금활동은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분위기는 특정 지역에 한정되지 않는 너무나 일상적인 현상이었다. 의연금 모금활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한북(漢北, 서울 북쪽지방 특히 함경도지방) 인사들 은 「한북국채보상단 성회취지서」를 발표했다. 이는 지역적인 차원을 벗어나 국민운동으로 진전시키려 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취지서를 세 번이나 광고 한 사실은 이들의 열망이 얼마나 컸던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한북흥학회 회원들도 국채보상회를 발기했 다. 한북흥학회의 오상규 · 이준 · 양효건 등 36인이 국 서북학회가 1908년에 지은 서북학회 회관과 이전 복원된 옛 서북학회 회관(현재 건국대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