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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024년 9월 Special Theme 한국광복군 창설 제84주년 특집 ‘한국광복군과 미국 OSS의 합동작전’ 동참모부와 같은 미국 군부기관들과도 접촉을 시도 했다. 임시정부의 외교적 호소는 단순히 임시정부를 도 와달라는 외침에 그치지 않았다. 조소앙과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광복군을 활용하는 것은 곧 연 합군의 승리를 도와 미국의 국익을 강화하는 것임을 피력했다. “(임시정부) 공식 승인을 요청하는 것은… 동맹국의 전투능력을 강화하려는 열망(조소앙→국 무부장관, 1942.10)”, “임시정부는 훈련된 한국군 병 사를 양성할 수 있다; 연합군에 편입된 이 한국인들 은 만 명에 이르는 미국인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전시 중 첩보는 매우 중요한 요소… 한국인 첩보장 교들은 중국 내 미군들에게 많은 귀중한 정보를 전 달할 수 있을 것(조소앙, 미 대사관 서기관과의 면담 중 1945.2)”, “공동의 적인 일본과 싸우는 데 그들의 몫을 다하여 미국에 물리적 봉사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이승만→미국 대통령 1943.5)와 같은 요 청들이 미국정부 또는 국무부에 접수되었다. 미국 국무부는 임시정부 관련 요청들을 군부기관 이 판단할 문제라 여겨 합동참모부‧OSS 등에 전달 했다. 한편 한국인의 전쟁 참전 의지는 환영하나 임 시정부의 승인은 국제사회에 문제를 초래한다는 것 이 국무부와 군부 대부분 관료들의 지배적인 의견이 었다. 그렇기에 한국인 군사들을 개별적으로 모집하자 는 의견이 미국정부의 대세였다. 임시정부의 광복군 같은 특정 단체를 연합군 전투에 활용한다는 것은 미국정부 관료들로부터 적지 않은 반대를 받았다. 미군과 광복군이 동맹을 맺고, 광복군이 열망하는 연합군 대일전쟁에 참전해 해방 후 임시정부가 국제 사회에서 당당한 권한을 갖는 것. 이것은 당장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으로 보였다. 한국광복군 - OSS 군사합작: ‘작전명 독수리’를 사수하기 위한 과정 임시정부의 지난했던 대미외교 과정, 그 가운데 임시정부는 실낱같은 희망을 찾게 되었다. 임시정부 는 미국 군부기관 중 첩보전을 위한 정보기구로서 독자적 권한이 더욱 보장되었던 OSS에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OSS는 그 전신이었던 COI 시절인 1942년 1월부 터 한국 문제에 관심이 있던 책임자 도노반(William J.Donovan)의 권한으로 대일전쟁 기밀작전에 대한 한국인 첩보활용을 구상했다. 그 때 친한파 OSS관료 게일과 이승만에 개인적으로 호의적이었던 굿펠로 우(Preston M.Goodfellow) 대령이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때에 임시정부는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우 선 미국에 있는 이승만이 굿펠로우와 교섭하며 광복 군 지도부와 함께 그 계획을 도울 수 있다는 제안들 을 내밀었다. 하지만 OSS의 한국인 첩보 활용 당초 계획인 ‘올리비아 계획(Scheme Olivia)’은 OSS 내 부 사정으로 몇 년간 진전이 어려웠다. 이때 임시정 부는 OSS가 대안으로 임시정부와의 협업을 위해 중 국으로 파견한 에이플러(Carl.F.Eifler)대위와 접촉할 수 있었다. 에이플러대위는 “한인단체들의 90%가 임시정부 를 지지하며 임시정부 산하 한인들을 한국이나 일본 에 파견해 파괴활동에 활용할 것”을 제안하며 임시 정부를 도왔다. 그럼에도 OSS의 한국인 대일전쟁 활용 계획은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