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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024년 3월 Special Theme  3 · 1운동 105주년특집 “3 · 1운동의 지역적 전개양상과 특징” 쇄되었다. 인쇄된 선언문은 그날 밤에 천도교 교당 옆의 이종일 사택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튿날 천 도교, 기독교, 불교의 조직망을 통해 전국에 인편으 로 전달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독립선언서를 수백 장 혹은 수천 장씩 받아서 기차를 타고 지방으로 내 려갔다. 이후 이 선언서가 전달된 곳에서는 대부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독립선언서가 갖는 위력은 대 단하였다. 서울의 만세운동 2월 28일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3월 1일 서울 을 비롯하여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만세시위가 일어 났다. 서울에서는 이날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민족대 표 29인이 참석한 가운데 선언식이 열렸다. 원래 독 립선언식은 파고다공원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전 날 민족대표들의 상견례 자리에서 학생들이 파고다 공원의 선언식 자리에 참석하는 경우 경찰과 충돌이 우려된다는 말이 나왔다. 결국 민족대표들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실내에서 선언식을 하기로 하였고, 태 화관을 선언식 장소로 결정한 것이다. 선언식은 선 언문 배부 – 한용운 연설 – 조선독립만세 삼창 순 으 로 진행되었다. 한편 파고다공원에는 예정대로 학생들 2백여 명 이 선언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러나 민 족대표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당시 선언문을 마침 갖고 있던 정재용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선언문 을 낭독하고 학생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태화관에서의 선언식 이후 민족대표들은 경찰에 연락하여 모두 경찰에 스스로 체포되어 갔다. 파고 다공원에서의 선언식 이후 학생들은 공원을 나와 시 가지에서의 시위에 들어갔다.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 며 행진하자 길가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 행진에 참 여했다. 이틀 뒤의 고종(高宗) 인산을 앞두고 서울에 는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있었다. 시위대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뉘어 시가지를 행진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이러한 사태를 전혀 예견하지 못한 경찰은 처음에는 시위대를 제대로 막지 못했다. 기마헌병이 출동하기 도 했지만 시위대가 돌을 던지자 도주하기도 했다. 세 갈래의 시위대는 덕수궁 대한문 앞을 중심으로 서대문, 서소문, 정동, 종각 부근을 돌다가 오후 4시 여학생들의 종로 일대 시위 광경(이상 독립기념관 제공)3 · 1운동 당시 덕수궁 앞에서의 만세시위 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