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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024년 2월 Special Theme  신간회 창립 97주년 특집 “한국독립운동과 신간회” 비타협적 성격 강조의 한계와 광범한 대중운동으 로서의 신간회 그런데 이렇게 비타협적 민족운동으로서 신간회 운동을 강조하는 기존의 인식은 일제의 지배정책과 민족운동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여러 측면에서 실증적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다. 첫째, 일제와 조선총독부가 ‘조선의회’로 상징되는 자치정책을 입안하지도 추진하지도 않았다는 점이 다. 일제는 식민지시기 내내 조선을 대륙 진출을 위 한 전략적 교두보로서 인식하고 있었고, 이런 전략적 중요성을 위협 하는 식민정책 의 변화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 다. 1919년 관 제개혁 이후 조 선 총독은 문관 도 임명될 수 있 었지만, 일제시 기 내내 조선총독이 군부 출신이었던 사실은 그 상 징 적 예이다. 그런데 식민지 조선에 조선인이 상당수 참여하는 ‘조선의회’가 수립된다면, 일제의 대륙진출 정책은 위협받을 것이고, 이는 일제의 특수한 정치구 조상 군부 및 특권세력의 약화를 반드시 가져오기 때 문에 이들은 ‘조선의회’ 같은 조치를 결코 허용할 수 가 없었다. 1920년대 들어 정당정치 시대가 도래 했지만, 일 본 정당정치세력 대부분은 조선에서의 자치정책에 부정적이었고, 논의하지도 않았다. 당시 조선총독 사 이토 마고토(齋藤實)는 이런 일본 정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참정권문제에 대해 아주 대 단히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1927년 초와 1929년 말 에 비밀리에 ‘조선의회’안이 아닌 ‘조선지방의회’안 을 만들었지만, 이는 실질적 법률제정 권한도 없는 단지 총독부 예산의 일부(1927년안은 25%, 1929년 안은 7%)만 심의하는 지방자치계획이었다. 이 조차 도 총독부가 마음대로 무력화시킬 수 있는 온갖 장치 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기만적인 안조차 본국에서 반대하자 곧바로 철회하고 1930년 제2차 지방제도 개정만 했다. 이 과정은 비밀리에 진행되었 으며, 공개된 적이 없다. 본국의 허가가 없었기 때문 에 자치정책은 추진되지도 않았다. 미쓰야(三矢宮松) 경무국장을 제외하고 자치공작을 전개한 총독부 관 료도 거의 없었다. 토착 일본인 관료들 중 일부가 자 치제를 주장했지만, 그것은 총독에 대한 건의 이상을 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당시 자치를 주 장하거나 자치운동을 전개한 민족주의세력은 거의 없었다. 단 일단의 천도교 신파만이 예외였다. 심지 어 친일정치세력조차도 3 · 1운동 직후 1920년대 초 1927년 2월 15일 신간회 창립대회 전경( 조선일보 1927.2.17) 신간회 창립대회 소식을 보도한 조선일 보 기사(1927.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