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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 순국선 열 독 립 항쟁사 27 진행하였다. 일반 민중은 물론 관료와 왕실의 전 폭적인 지원과 관심으로 독립협회는 곧바로 거대 한 사회단체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이는 외세(청 나라)에 대한 자강운동에 불과하였다. 이후 독립 협회는 토론회, 강연회 등을 통하여 민중계몽에 나섰다. 토론회와 독립신문 등을 통하여 보수파 정권의 외세의존정책을 비판하자, 보수적 관료층 의 이탈이 심화되었고, 대신 개혁파 관료들과 재 야·신지식인층이 주류를 이루며 민중적 사회단 체로 탈바꿈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외세의 이권침탈이 노골화되자 독립협회는 구국운동을 선언하며 1898년 ‘만 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만민공동회는 국정의 개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적 민중 대회다. 대회는 수시로 열려 외국의 이권 침탈과 내정 간섭을 규탄하고 외국에 의존하는 왕실 을 비판하는 등 국권과 국익을 수호하려는 자주 국권 운동을 펼쳐나갔다. 또한 국가주권의 자주화, 국 가이권의 수호, 국가재정의 일원화, 국민자유권의 보장, 인사행정의 공정화, 국왕자문기구 중추원의 의회 개편 등을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국정개혁안)를 건의하기도 하였다. 이에 고종황제와 정부는 민회와 민중의 요구를 받아들여 헌의 6조를 재가하고 중추원관제를 반포하였다. 독립협회의 활동이 왕성해지 자 보수집권세력은 불안을 느끼 고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하고 공화제를 실시하려 한다.”고 무 고하였다. 이에 정부는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하는 한편, 어용단 체인 황국협회를 시켜 독립협회 와 만민공동회를 습격하도록 하 독립협회가 민중계몽을 위하여 마련한 강연회에 모여든 군중들. 독립협회는 구국운동을 선언하며 1898년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였다. 만민공동회는 국정개혁 과 의회 설립을 위하여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중 대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