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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생부와 양부가 모두 살해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민씨 일파로 권력을 누리던 민영환 선생이 국가 개혁에 매진하게 된 계기는 니콜라이 2세의 대관 식을 위해서 러시아로 가던 중이었다. 러시아로 가던 중 뉴욕에 3일간 머물고 네덜란드, 독일, 폴란 드를 거치면서 근대화된 도시를 볼 수 있었고 이듬해에는 런던에서 40일 간 체류했다. 이때의 외유 는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그를 뿌리부터 바꾸는 계기가 됐다. 귀국 후 서구의 근대식 제도를 모 방하여 정치·군사 제도 등을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민권을 신장하여 근대식 국가 발전을 꾀하고, 군제를 개편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상소를 광무 황제에게 올렸다. 하지만 당시 전제정치를 추구하던 황제의 성향과는 달라 군제 개편 건의만 채택되 어 육군을 통솔하는 최고 기구로서 원수부 설치가 이루어졌다. 대한제국 당시 가장 자주적이고 진보적인 관료 민영환 선생은 정부뿐 아니라 민간을 통해서도 활동을 시작해 당시에 가장 자주적이고 진보적인 관료로서 독립 협회를 적극 후원했다. 당시 독립협회의 핵심 인사였던 정교는 “지금 정부 요인 가운데 국민이 신임할 수 있는 인 물은 선생과 한규설 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독립협회는 1898년 10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수구 파 대신의 퇴진과 개혁파정부의 수립을 요구하는 상소와 철야 시위 끝에 개혁파 내각을 수립할 수 있었다. 민영환 선생은 개혁파 내각의 일원으로 군부대신 겸 내무대신에 임명되어 군사권과 경찰권을 장악하고 개혁파정부의 실 세로서 독립협회 운동을 지원했다. 동시에 정부는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안을 받아들여 중추 원을 의회로 개편하는 의회설립법을 공포했다. 하지만 공 화정을 수립하고 군주제를 폐지하려고 한다는 수구파의 모략으로 독립협회가 해산됐고 선생도 일시 파면됐다. 하 지만 광무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기에 다시 참 정대신·탁지부 대신에 임명돼, 민영환 선생의 건의에 의해 설치된 원수부의 회계국장·장례원경· 포훈원총재·헌병사령관을 역임했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았다. 일제는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같은 해 2월 대 대한제국의 진보적 관료였던 민영환 선생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