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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1910년대 국제정세와 2 · 8독립선언 27 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민족과 나라들은 강화회의에 서 자기의 주장을 내세울 수도 있지만, 전쟁에 참가 하지 못한 한국이 강화회의로부터 어떤 성과를 얻어 내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또 한편에 서는 ‘민족자결주의’ 자체를 선전용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그렇기에 안창호는 윌슨 대통 령에게 한국의 독립승인을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희 망이라고 규정했고, 『신한민보』 논설에서도 이번 파 리강화회의에의 대표 파견 결정은 어디까지나 ‘기회 적 외교’를 시험해보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점을 강 조했다. 일본에 있던 조선인 유학생 사회의 반응도 비슷했 다. 후에 2 · 8독립선언 대표자 중 1인으로 참여했던 서춘(徐椿)은 독일 항복으로부터 열흘 뒤인 1918년 11월 22일 재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 린 학 우회 편집부 주최 현상연합웅변회에서 발언하였다. 미국과 영국이 필리핀과 인도 등 자신들의 식민지를 먼저 해방시키지 않는 상황을 문제제기한 것이었다. 더 나아가 그들이 말하는 정의, 인도, 자유, 평등에 의문을 표시했다. 결국 독립을 쟁취할 실력 없이는 정의 인도를 주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인식했다. ‘민 족자결주의’에 신중하고 비판적 접근은 2 · 8독립선 언을 결의한 1919년 1월 6일 웅변회 직전까지도 지 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미국, 중국 상하이[上 海]와 국내에서 파리강화회의 대표파견과 2.8독립선 언, 3 · 1운동이 이어졌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 은 여전히 제국주의 국가들이 대전이후 세계를 조정 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피식민 민족들은 제국주 의 국가들의 전후질서 논리를 전취하여 스스로 세상 을 변화시킬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야 만 · 군국주의 · 전제주의’와 ‘문명 · 평화주의’의 대결이 라는 이분법적 시선은 세계대전을 경험한 사람들을 납득시킬 만한 보편타당성을 상실했고, 이제는 식민 지 조선의 대표들이 ‘완전하고 투철한 민족자결주의 의 실제적 승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학생층의 삼일운동 참여와 조선총독부의 대응」(2024.8)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편, 『3.1운동 100년』 전5권, 휴머니스트, 2019(기획 및 공저) 등 다수의 논저가 있다. 필자 최우석 크레인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의 식민지 통 치상황을 호소하고 협력을 요청한 여운형 (경기일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