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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함경도 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의 역사적 의의 27 근대교육을 시행한다면 비로소 국권회 복이 도모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는 곧 사립학교설립운동과 야학운동 등 활동영역 확대와 교육 내실화에 집중 되었다. 다만 대부분은 약육강식 원리 에 입각한 제국주의 식민지배를 ‘당연 한’ 국제질서로서 인식하는 한계를 보 였다. 한편 ‘절대자 앞에서 만민평등’이라 는 슬로건은 신분제 아래에서 고통받 는 하층민이나 부인 등에게 새로운 ‘등 불이자 희망봉’으로 다가왔다. 미국을 선두로 캐나다·호주 등 선교본부는 앞다투어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했다. 개신교단에서는 선교사를 파견 하여 원산에 선교거점을 마련하여 본격적인 선교활 동에 들어갔다. 이들은 차가운 주민들 반응에 전혀 얽매이지 않고 의료활동과 교육활동에 열성을 다했 다. 교세 확대와 주민 인식 변화는 사소한 일상사와 더불어 가치관 변화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야학이 새로운 배움터로 자리매김하다 근대교육은 학교생활 전반에 대한 많은 변화를 초 래하였다. 운동회는 주민들과 유대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지역축제’였다. 정정당당한 경쟁 속에서 학생 들이 자신감을 북돋우는 교육현장으로서 주목된다. “건전한 생각은 건전한 신체”라는 격언이 학교운동 회에서 점차 확산되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건강은 물론 스스로 신체단련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교육현 장이 바로 운동회였다. 특히 각지에서 열린 연합운 동회는 지역민 축제장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운동 회 이후 거의 연설회나 강연회가 개최되어 당면 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수렴이 여기에서 이루어 졌다. 교우회(校友會)나 동창회 등은 계몽활동을 전 개하는 등 지역사회에 대한 사회적인 책무에 소홀하 지 않았다. 주민들 부담에 의한 ‘의무교육’인 경우는 비교적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었다. 이동휘가 강화도를 중 심으로 운영한 보창학교 지교(支校)와 서북학회가 운영한 협성학교 지교 등은 이러한 사실을 방증한 다. 원산 · 경성 · 함흥 · 성진 · 단천 · 북청 등지는 새로운 교육운동 ‘메카’로서 자리매김하였다. 교육열이 고 조되는 가운데 근로청소년이나 문맹자를 위한 야학 은 새로운 배움터로 자리매김했다. 서북학회는 물장수들의 요구에 호응하여 학회 내 에 ‘물장수야학(급수상야학)’을 설립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 계몽운동가 중의 한사람인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은 노동야학의 번성을 기원하고, 이들 을 격려하는 취지에서 「노동동포의 야학」 소식을 다 일제강점기 함북 성진군 성진읍 제동병원 앞의 그리어슨 선교사(앞줄 가운데)와 간 호사 등 병원 직원들(국민일보 제공). 그리어슨 목사는 1902년 성진에 제동병원을  세우고, 지역 의료 선교에 앞장섰다. 그는 욱정교회와 보신학교를 세워 운영하기도  했다. 배민수는 1919년 3월 초 이 병원 등을 중심으로 성진 3·1 만세운동을 주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