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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회근(宋晦根)은 경상북도 성주 (星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파리장서(巴里長書)의 서명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동년 4월 2일의 성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정(李基定)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성주 군내의 유력한 유림들인 이기정·성대식(成大湜)·송수근(宋壽根)·송우근(宋祐根)·장석영(張錫英)·송훈익(宋勳翼)·김희규(金熙奎)·송준필(宋浚弼)·이봉희(李鳳熙)·송규선(宋圭善)·송문근(宋文根)·송인집(宋寅輯)·송천흠(宋千欽) 등과 성주 장날인 4월 2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대가면 옥화동(大家面玉化洞)교회의 유진성(兪鎭成) 목사가 중심이 되어 기독교측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유진성을 찾아가 유림·기독교도들이 연합시위를 전개하기로 협의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다하였다. 4월 2일 오후 1시경, 계획대로 경산동 관제묘(京山洞關帝廟) 뒷산에 모여 있던 기독교도들이 먼저 성주시장을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시장에서 대기중이던 그는 60여명의 유림들과 함께 3천여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겁을 먹은 일본 경찰의 발포로 부상자가 발생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시 후퇴하였으나, 이날 밤 10시경까지 독립만세시위를 계속 전개하였다. 그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