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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희생과 통합 지향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 홍진 27 대의를 위해 희생을 강조하다 홍진이 상하이에 도착한 것은 1919년 4월 16일이 었다. 이미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 사람들에게 한성정부가 조직 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상하이 임시정부는 한성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도리어 밀정으 로 의심받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통 합 움직임이 일어났다. 마침내 9월 11일 한성정부를 기반으로 하는 통합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수립되었 다. 통합 임시정부의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하여 국무총리 이동휘 등 정부 각원들 이 한동안 취임하지 않았다. 특히 임시정부의 ‘승인 개조’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인사들이 사퇴하거나 취임을 거부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홍진은 통합 임시정부의 빠른 출발을 바랐고, 이 를 위해 직접 나섰다. 상하이에 와있던 국무총리 이 동휘를 만난 것이다. “우리는 다 일신을 희생하는 각오를 가져야 하 리라. 민충정(민영환)의 유언에 살고자하면 반 드시 죽고, 죽고자 하면 삶을 얻노라 함을 생각 하라. 나는 어제 국무총리를 방문하여 속히 희 생적 준비를 실행키를 권하였노라”(「一死가 有 할뿐, 洪先眞生談」, 『독립신문』 제15호, 1919년 9월 30일). 그가 강조했던 것은 희생이었다. 자신이 모든 것 을 버리고 상하이에 온 것처럼 이동휘를 비롯한 각 원들도 통합 임시정부로의 역량 결집을 위해 희생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이후에도 자신을 희생하며 임시의정원과 임 시정부 활동을 이어나갔다. 1921년 5월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되면서 개점휴업 상태였던 임시의정 원을 정비해나갔다. 새로운 의원을 선출하고, 의정 원 조직의 결원을 충원해 나갔다. 또한 대(對)태평양 외교후원회를 발족하고, 간사장을 맡아 태평양회의 에 임시정부의 외교 역량을 결집시키고자 했다. 그 러나 태평양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거론조차 되지 않 으면서 임시의정원 의장을 사퇴하기도 했다. 1922 년 8월 법무총장에 선임되고, 이듬해 국민대표회의 가 창조파와 개조파 간의 갈등으로 번지는 와중에서 수립 직후 상하이 하비로(霞飛路)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정청’ (청사)의 모습(1919년 10월 11일, 경기도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