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page

Special Theme • 3 · 1운동의 태동과 서울 3 · 1운동의 전개 27 적 운동, 비폭력 운동을 정하였다. 이에 따라 천도교측은 기독교측과 연합하여 운동 을 전개하기로 하고 기독교측과 접촉하게된다. 천도 교측은 2월 초 최남선, 현상윤을 통해 평북 정주의 기독교 장로 이승훈(李昇薰)을 서울로 초청하여 협상 에 들어갔다. 당시 서북 지방의 기독교인들은 2월 초 상하이에서 파견되어 온 신한청년당의 선우혁을 통 해 국외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고, 이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기독교와 천도교 의 합작 논의는 쉽지는 않았다. 이승훈은 서울의 기 독교인들과 만났는데, 이들은 독립선언보다는 독립 청원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천도교측은 독립선언이 아니면 안된다고 통고하였다. 결국 기독교측은 독립선언 안(案)을 받 아들였고, 천도교측은 기독교측의 독립운동 자금으 로 5천 원을 내놓았다. 그런 가운데 최남선은 독립선 언서와 파리강화회의 및 미국대통령에게 보낼 독립 청원서, 일본정부에 제출할 독립의견서도 집필하고 있었다.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은 독립선언의 날 짜를 고종 인산 이틀 전인 3월 1일로 잡았다. 그리고 독립 선언서를 다수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하고, 서울과 각 지방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한편 서울의 학생들도 움직이고 있었다. 중앙기독 교청년회를 중심으로 서울의 전문학교 학생들은 1 월말부터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의견 을 모았다. 그런 가운데 도쿄 유학생들의 2 · 8독립선 언 소식이 전해졌고, 서울의 학생들도 이에 호응하 는 운동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때 천 도교와 기독교측에서 학생들도 천도교-기독교 합작 운동에 참여할 것을 제안하였고, 학생들도 이를 받 아들였다. 이에 따라 학생들은 독자적으로 준비하던 독립선언문을 폐기하였다. 한편 불교측도 막판에 한 용운(韓龍雲)을 통해 참여를 결정하였다. 2월 26, 27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 33 인의 명단이 정해졌고, 독립선언서가 천도교측의 보 성사에서 이종일의 주도 하에 27일 밤 21,000매 인 3 · 1독립선언서(독립기념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