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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신간회운동의 세계사적 의미 - 민주주의 민족운동으로서 신간회운동 27 신간회는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 자들이 민족의 당면 공동 목표를 위 해 연합한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단체였다. 그런데 비타협적  민족운동으로서 신간회운동을 강조 하는 기존 인식은 일제의 지배정책과  민족운동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여러 측면에서 실증적 한계에 직면하 게 되었다. 이렇게 신간회가 합법적  운동의 틀과 방법을 유지하려고 한  이유는 다양한 사상과 계급적 이해관 계를 달리하는 광범한 정치사회세력 과 대중을 망라하는 민족단일당, 민 족협동전선이 되기 위해서였다. 신간 회는 그 합법적 형식을 유지하기 위 해 불가피하게 식민권력과 협상을 했 지만, 결코 일제 총독부권력과 타협 하지 않았다. 근대 국민국가의 역사 는 제반 민주주의적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사회개혁과 민주주의운동의 역 사이었다. 민족 구성원 대부분이 거 주하는 국내에서의 운동도 국외운동  못지않게 중요했다. 신간회운동은 각 계각층의 이런 다양한 사회운동과 민 주주의 민족운동의 종합판이었다. 신 간회는 근대 국민국가 수립에 필수적 인 민주주의 훈련장이자 민주주의 민 족운동의 거점이었다. 신간회 내에서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때 로는 협력, 때로는 대립했지만 그런  과정 자체가 근대 민주 정치의 훈련 이기도 했다.  신간회에 대한 관심과 기존 인식 1927년 2월 15일 식민지 조선에서 일단의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 자들이 연합하여 ‘민족단일당’ 형태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했다. 1924 년 중국에서 있었던 제1차 국공합작과 중국 국민당의 선례가 참고 되어 개인가맹 형태로 조직을 결성했지만, 식민지라는 조건에서 그 결성방법 과 활동에서는 크게 차이가 있었다. 그동안 신간회는 몇 가지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첫째는 신간회가 140여 개의 지회와 4만여 명 회원을 갖는 대중적 정치 사회단체로 성장 하여 일제 강점기 국내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단체이었다는 점이다. 둘 째는 서로 다른 사상과 이념을 가진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민 족의 당면 공동 목표와 주장을 가지고 연합했다는 점이다. 특히 해방 후 남과 북이 자본주의국가와 사회주의국가로 분단되면서, 좌 · 우 대립과 남북 분단 체제를 넘어 민족통일을 지향해야 한다는 현재적 관심과 맞 물려, 운동 이념과 방법의 차이를 넘어 좌 · 우가 연합해서 4년여 동안 활 동했던 신간회의 경험이 크게 주목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그동안 신간회 연구에서 중점적으로 논해졌던 것은 운동의 ‘비타협’적 성격이었다. 곧 신간회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자치정책을 배경으로 전개된 타협적 자치운동을 배격하고, 이를 거부하 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세력이 사회주의세력과 연합하여 결성한 조직이 었다는 것이다. 신간회는 비타협적 운동을 계속했는데, 1929년 광주학 생운동 때는 민중대회를 개최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신간회 중앙 집행부가 크게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30년 새롭게 조직된 신간 회 중앙집행부가 비타협적 방향 대신 타협론자들과 협력하여 타협적 방 향으로 나아가게 되면서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신간회 해소론이 제 기되었고,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흐름과 맞물려 결국 해소되었다는 것이 다. 이렇게 신간회 운동의 비타협적 성격이 강조되면서 자치운동 추진 과 신간회 참여를 기준으로 민족주의세력을 타협적 민족주의세력과 비 타협적 민족주의세력, 민족주의 우파세력과 민족주의 좌파세력으로 나 누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신간회에 대한 이런 인식은 오랫동안 지속되 어 현재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도 비슷한 논지로 서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