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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홍범도를 도운 동지들 - 차도선 · 박경철 · 이병채 27 1890년대 말 함경도 산포수(사냥꾼)들의 모습(독립기념관 제공) 홍범도(洪範圖)는 1907~8년 함경 도 지방에서 차도선 등 산포수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수십차례 치열 한 의병전투를 치르며 일본 침략세 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때문에 후 기 항일의병전쟁사에서 홍범도와  함께 싸웠던 동지 차도선 의병장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 다. 또 1919~1921년 독립전쟁 고 조기에 대한독립군 참모로 홍범도 를 도운 동지 박경철 · 이병채의 활 약도 중요한 의미를 남겼다. 이들 은 독립전쟁의 이념과 명분을 체계 화하여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밝히 는데 큰 힘이 되었다. 특히 이병채 는 홍범도와 함께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하여 자유시사변 당시 입은 만 주 독립군의 피해 조사와 진상규명 을 호소하는데 앞장섰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차도선, 1907~08년 초 홍범도와 함께 함경도 의병부대 함께 이끌어 ‘나는(날으는) 홍범도, 뛰는 차도선’. 1900년대 초 홍범도 의병장과 함 께 함경도 일대에서 산포수 의병들을 모아 ‘산포대(山砲隊)’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일본군과 싸웠던 홍범도와 차도선(車道善) 의병장에 대해 당 시 함경도 민중이 칭했던 말이다. 홍범도와 함께 차도선의 활약이 칭송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함께 싸웠던 홍범도 장군의 명성에 비해 차도선이 그리 알려 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차도선은 1863년 1월 19일(29일) 함경남도 북청군 풍산면(일부 기록 에는 갑산군) 에서 태어났다. 그가 대한제국 진위대 군인이었다는 설도 있고, 금광의 광부(鑛夫) 출신이었다는 설도 있다. 함경도 지방에서 의병봉기를 촉발한 결정적 사건이 바로 1907년 8월 서울의 군대해산 이후 마지막으로 진행된 북청 진위대의 해산과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의 강제시행이었다. 특히 일제가 의병을 탄압하기 위 해 이 해 9월 3일 제정 공포한 이 법령은 산포수가 많은 함경도 지방에 매우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산포수들이 생업에 커다란 위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1907년 11월 16일 차도선은 홍범도, 태양욱(太陽郁)과 손잡고 약 70 명의 의병을 이끌고 당시 일진회(一進會) 회원이었던 북청군 안산(安山) 면장 주도익(朱道翼)을 처단한 후 구국항일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주도 익은 당시 주민들에게 단발을 강요하고 또 각종 세금을 거두어 사취하 면서 주민들을 일진회에 강제로 가입시키는 등 부일매국적 행동을 자행 하고 있었다. 이러한 친일주구배 처단은 민중의 울분을 풀어 주어 당시 구국항일의 애국적 인사들과 일반 민중은 차도선의 의 거를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차도선은 그 후 홍범도 · 태양욱 등 포수들과 북청의 후치령(厚峙嶺) 일대에서 약 3백명의 산포수들을 규합 하여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부독(副督, 이후 도대장[都 大將])이 되었다. 이름은 부독이었으나, 사실상 홍범도 와 함께 각지 산포수들을 규합하여 짧은 기간에 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