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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 독립장│조명하(趙明河) 나는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있 었 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항쟁은 계속하리라. - 조명하 의사의 유언 - 독립항쟁가들의 무용담을 들으며 키운 애국심 조명하 의사는 1905년 4월 8일(음력) 황해도 송화군에서 태어났다. 의사는 1926년 3월 보통학교를 졸업 후 신천군청의 직원으로 고용됐다. 일찍이 총명하고 강직한 성품의 의사는 그곳에서 일제에 탄 압받는 민족의 쓰라림에 눈을 떴다. 같은 황해도 출신의 김구 선생과 노백린 선생 등 독립항쟁선각자들의 무용담을 전해 들었고 특히 그해 4월에 창덕궁 금호문 앞에서 있었던 송학선의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암살 미수 사건 은 그의 마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독립을 위해 자신이 무얼 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선생은 마침내 큰 결심을 한다. 아들 혁래 를 낳고 친정에서 몸조리하던 부인 오금전 씨를 어머니와 함께 보러 가던 길에 의사는 갑자기 “큰 볼 일이 있어 멀리 떠나야겠습니다”라며 발걸음을 돌렸다. “여기까지 왔으니 처자를 보아야 하지 않겠 느냐”며 극구 말리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친 채 돌아섰다. 본인의 결심이 처자식을 만나 흔들릴지도 몰라 자신을 채찍질했던 것이다. 여중구 등 친구 6명이 마련해준 여비를 받아 9월쯤 고국을 떠났다. 항일을 위해서는 우선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조명하 의사는 현해탄을 건너 일본 오사카에 도착했다. 저 세상 가서도 독립항쟁은 계속 하리라 타이완 타이중 시에서 육군 특별 검열사 구니노미야 구니히코에게 칼을 던져 그를 처단했다. ● 1905년 4월 8일(음력) 황해도 송화 출생 ● 1928년 타이완 타이중시에서 일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처단 ● 1928년 10월 10일 타이완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사형, 순국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핵심공적 주요약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