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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67 열사는 이 단체에서 송병조, 김두봉, 김규식, 윤기섭, 최동오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 으로 선출됐다. 이 단체는 1933년 7월 5일 독립항쟁가들이 소망하던 단일정당인 민족혁명당을 탄생 시키는 모체가 됐으며 열사는 이 단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독립군의 통합만으로는 일제와 싸우기가 힘들어 독립군은 중국의 무장단체와 협력한다. 1938년 10월 10일 무한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된다. 열사는 이곳에서 핵심부서인 편찬위원회의 주편에 임 명돼 기관지 「전고」를 발행해 선전공작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독립항쟁의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고 전세는 일본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갔다. 독립항쟁을 적극적으로 협력해 주던 중국 국민당 정부도 1938년 10월 25일 무한이 일본군에 함락되면서 자신들 앞가림 만으로 급한 처지가 됐고 조선의용대 는 계림으로 이동했다. 동료를 지키기 위해서 장렬히 전사하다 일제와의 전투가 격렬해지는 가운데, 중국 국민당은 일제를 몰아내기보다는 정치적 문제 에만 힘을 더 썼다. 윤세주 열 사는 화북지방에 진출하겠다 는 빌미로 중국 국민당에서 떨 어져 나와 팔로군의 주요 근거 지인 태항산으로 이동했다. 열사가 태항산에 도착하자 팔로군은 홍복사를 조선의용대 본부 건물로 제공했다. 도착한 다음 달에 이곳에 조선의용대 간부훈련반, 화북조선청년학교를 개설했다. 팔로 군과 함께 항일 무장활동에 열중한 열사는 모든 대원에게 존경받고 중국인들도 신뢰하는 지휘자가 된다. 1942년 5월 24일 화북지방에 있던 일본군은 주력군 3만여 명을 이끌고 팔로군을 일시에 제거하겠다 는 계획으로 태항산을 공격했다. 전차와 폭격기의 공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윤세주 열사는 대원들과 함 께 산으로 올라가 일본군을 비무장 대원들을 엄호하며 포위 돌파를 시도해 작전개시 5시간 만에 탈출 로를 확보했다. 3일 뒤 산속을 지나던 조선의용대는 일본군과 맞닥트리게 된다. 열사는 동료들을 구하 기 위해 진광화 최채와 함께 일본군을 유인하다가 총탄을 맞고 쓰려졌다. 중상을 입은 열사는 결국 6 월 3일 숨을 거두었다. “단결해서 적을 사살하기 바란다”는 말이 동지들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윤세주 열사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태항산에 있던 윤세주 열사의 묘(우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