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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고 일본은 그해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피고가 없는 궐석재판으로 진행됐다. 그 일에 관련된 사람 중에서 열사가 가장 높은 형인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중국 길림에서 김원봉 등과 의열단을 창립하다 만주로 망명한 윤세주 열사는 요녕성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신흥무관학교는 당시 국내의 독립항쟁비밀단체인 신민회의 결의에 따라 세운 독립군양성 무관학교로 선생은 이곳에 서 정식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 구체적인 항일 방법을 찾던 열사는 친구 김원봉과 동료 13명과 함께 1919년 11월, 길림에서 조선의 열단을 결성했다. 의열단은 조선총독부 등 일제 침략기관 파괴와 원흉들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 웠고 실행을 할 인물을 물색했다. 열사 본인이 직접 나서 신철휴, 윤치형 등과 함께 국내에 들어와 활동을 시작했다. 파괴활동을 수 행하기 위해 자금과 정보를 모으던 중 정보가 누설되어 국내의 동지 50여 명과 함께 잡혀 수감됐고 5년 4개월의 감옥 생활을 하고 1927년 출옥했다. 그 후 중외일보 기자, 경남주식회사 사장 등으로 지내며 독립항쟁에서 손을 뗀 것처럼 조용히 지 내다가 1932년 여름 일제의 눈을 피해 중국 남경으로 갔다. 그 후 열사의 독립항쟁방법도 바뀌었다. 열사가 “과거에는 열정과 용기만을 갖고 싸웠으나 앞으로는 혁명적 인생관과 과학적 혁명이론으로 재무장, 정확한 혁명운동을 하겠다”는 말에서 알 수 있다. 한국대일전선 통일연맹의 중앙집행 상무위원으로 선출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 선생은 1932년 10월 20일 중국군사위원회 간부훈련단 제6대에 입교했다. 이때는 독립항쟁전선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때였다. 그는 독립항쟁단체들과 연합준비위원회를 구성한 뒤 해외독립항쟁단체들을 참가시켜 그해 11월 10일 한국대일전선 통일연맹을 결성했다. 조선의용대 창설사진 계림에서 찍은 조선의용대 창립 1주년 기념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