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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025년 5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귀환과 해방 정국’ 고도 독립국가 수립 과정에서 한국인의 발목을 잡았 다. 이처럼 중국에서 살던 일반 한국인과 독립운동 가의 해방을 맞이한 입장은 달랐던 것이다. 역습 1944년 4월 임정은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이 하 민혁당)의 참여로 좌우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좌 우연립정부 구성 과정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한 국독립당과 민혁당은 정당 통합 및 임정 참여 문제 를 두고 상처를 줬다. 상처가 다 아물기에 앞서 해방 을 맞이했다. 민혁당 요원들은 이제 자기 앞길을 걸 어갔다. 그것은 귀국에 앞서 임정을 해체하는 것이 었다. 첫 번째 시그널은 8월 17일 중앙문화회의당에 서 열린 ‘재중경(在重慶) 한국혁명운동자대회’였다. 이 회의에 참여한 김규식, 김순애(김규식 부인), 최형 록, 손두환 등 10여 명이 중심이 되어 임정과 대한민 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이하 임시의정원) 개조 사 항 7개항을 결의했다. 결의안은 18일에 임시의정원 에 청원안으로 제출됐다. 민혁당의 임정을 흔들고 해체시켜려는 움직임 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8월 18일 제39회 임시의정원 이 열렸다. 회의가 열리자 민혁당 소속 의원들은 모 든 국무위원 사직이라는 칼을 꺼내 들었다. 사실 이 날 한독당이 제출한 안건도 논의 테이블에 올라갔 다. 27년간 유지하고 지켜온 임정을 귀국하여 국민 에게 봉환(奉還)하고, 이를 위해서는 현 임정 체제로 한국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한독당 요원들의 생각 이었다. 이에 손두환이 격렬하게 맞섰다. 반격 김구가 서안(西安)에서 중경으로 돌아왔다. 사실 그는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리는 18일 아침에 중경에 왔다. 제39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리는 줄 알았지 만, 가지 않았다. 그는 그동안 쌓인 피로로 주말동안 휴식을 가졌다. 8월 21일 김구는 국무회의를 열었 다. 이 자리에서 그는 총사직에 뜻을 같이 할 수 없다 고 했다. 민혁당이 주장하는 임정 해체는 있을 수 없 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한국독립당의 반격이 시 중국 중경시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이세현 제공) 중경 상청화원에서 열린 장개석·송미령 등 국민당 요인들의 임시정 부 요인 환송식 광경(1945.10.24, 중부일보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