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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024년 11월 Special Theme  11 · 3(광주)학생독립운동 제95주년 특집 ‘11 · 3(광주)학생독립운동을 다시 본다’  학생들은 식민지민으로 살면서 조선시대 신분 차 별보다 강고한 민족 차별을 받는 현실에 저항하고 독립을 희망하기에 만세시위에 나섰던 것이다. 그렇 게 학생은 3·1운동으로 처음 정치사회적 주체로 등 장했다. 학생 연대, 그리고 학생과 종교계의 연대 3·1운동 역사에서 맨 앞에 등장하는 학생은 ‘2 · 8 독립선언’을 발표한 도쿄(東京) 유학생들이었다. 1919년 2월 8일 오후 3시 일본 도쿄에 자리한 조선 기독교청년회관에는 200여 명의 한국인 유학생이 모였다.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를 다니고 있던 백관 수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에 경찰이 독립선언 서 낭독을 금지하려 시도하면서 학생과 충돌이 일어 났다. 경찰은 현장에서 학생 27명을 체포했다. 도쿄 유학생들은 자신들만의 2 · 8독립선언을 계획 하지 않았다. 독립선언을 준비하면서 와세다대생인 송계백을 국내로 밀파했다. 송계백은 1919년 1월 하 순 경에 서울에 도착했다. 보성중학교 출신인 송계 백은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인 최린, 보성중학교 선 배이자 중앙학교 교사인 현상윤, 중앙학교 교장 인 송진우, 그리고 최남선을 만나 2 · 8독립선언서 초안 을 보여주었다. 최린은 손병희에게 초안을 보여주었 다. 손병희는 “젊은 학생들이 이같이 의거를 감행하 려는 이 때에 우리 선배들로서 좌시할 수 없다”며 독 립운동 준비에 열의를 보였다고 한다. 서울 시내 전문학교 학생들은 1919년 1월 말부터 독립운동을 모의했다. 1월 26일 경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보성법률상업학교의 강기덕, 경성의학전문 학교의 한위건 등이 보성법률상업학교 졸업생인 주 익, 조선기독교청년회 간사 박희도 등과 함께 모임 을 갖고 국제정세와 독립운동 문제를 논의했다. 1919년 2월에 들어서는 주익이 독립선언서를 기 초하고 전문학교 학생을 동원하여 시위를 벌인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2월 20일에는 전문학교별 대표를 뽑고 대표자들이 체포된 후 시위를 이끌어갈 책임자 도 정했다. 2월 23일 박희도가 전문학교 대표들에게 종교계가 독립시위를 벌일 예정이라며 연대를 제안 했다. 2월 24일에는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에 서 종교계 주도의 독립선언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전 했다. 전문학교 대표들은 다음 날부터 이틀간 회의 를 열고 학생만의 독자적 시위에 종교계가 독립선언 식을 개최하는 3월 1일에 중등학교 학생들을 동원해 탑골공원에서 독립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 무렵 도쿄여자유학생친목회 회장으로서 ‘2 · 8 독립선언’을 발표할 때 참석했던 김마리아가 2월 17 일에 ‘2 · 8독립선언서’를 갖고 귀국했다. 부산에서 대 구로 다시 광주 언니의 집에 들렀다가 2·8독립선언 서 수백 장을 인쇄했다. 2월 21일에 서울에 들어온 김마리아는 2·8독립선언 소식을 알리고 2·8독립선 ‘2 · 8독립선언서’를 갖고 귀국하여 국내  3 · 1운동 발발에 크게 기여한 김마리아 (이상 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