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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024년 10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특집 ‘대한제국기 구국계몽운동의 재조명’ 로 전개되었다. 계몽운동 중 근 대교육운동은 을 사늑약을 기점 으로 성격이 크 게 변화했다. 부 국강병을 위한 시무책으로 시 작된 근대교육 은 이제 국권회 복이 우선적인 과제였다. 함경 도 출신으로 서 울에서 활동하던 전 · 현직 관료와 계몽론자 등은 한북흥학회(漢北 興學會)와 서북 학회(서우학회 와 한북흥학회의 통합)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대표적 인 인물은 이용익(李容翊, 1854~1907) · 이준(李儁, 1859~1907) · 이동휘(李東輝, 1872~1935) · 오상규 (吳相奎, 1858~1922) · 이종호(李鍾浩, 1885~1932) 등이었다. 경제적인 자립을 표방한 국채보상운동 참 여도 사회적인 책무를 절감하는 현장교육이나 마찬 가지였다. 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에 주목하는 이 유도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시세에 부응하는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다 19세기 말 만민공동회의 토론회 · 연설회는 민중층 에게 사회적 존재감을 일깨웠다. 이러한 자각은 확 대된 안목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지름길이었다. 러일 전쟁 발발을 전후로 고조된 위기의식은 계몽단체 조 직과 활동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는 대한제국이 열강에게 자국 이익을 위한 흥정 대상인 일종의 전리품에 불과한 “국제적인 미아” 신세가 되 게 하였다. 이에 따라 위기의식이 고조되면서 서울을 중심으 로 전개되던 계몽운동은 지방으로 파급되어 나갔다. 지회(支會) 회원은 지역사회 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 동을 주도하는 중심세력이었다. 한북흥학회 · 서북학 회 등은 함경도와 서북지역 출신 재경 세력에 의해 조직된 계몽단체였다. 이들은 정보교류를 통해 주민 들을 계몽하는 한편 문명사회 건설을 위한 민지(民 智) 계발에 노력했다. 지회의 주요 활동은 역시 근대적인 교육기관의 설 립에 집중되었다. 전통교육기관인 사숙(私塾)이나 의숙(義塾) 등을 폐지하자는 주장은 이러한 시대 상 황과 맞물려 있었다. 이들은 사립학교 설립에 의한 남산성에서 본 함북 경성. 1911~1912년 촬영(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함경북도 회령군읍지』(서울대학교 규장 각 소장). 조선 말기~대한제국 초기에 편 찬되었다. 1910년대 초기에 촬영된 함경북도 경성 남문과 문 밖 비석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