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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024년 9월 Special Theme 한국광복군 창설 제84주년 특집 ‘한국광복군과 미국 OSS의 합동작전’ 국군의 대일첩보작전을 도왔다. 일부는 광복군의 군사력 증대를 위해 초모활동을 하던 중 일본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중국군사위원회의 원칙에 따라 대규모 전쟁 참전은 쉽지 않았다. 독립을 위한 참전을 열망하던 한국광복군은 지속적인 군자금 부족에 따른 어려움에도 시달렸다. 우선 중국 국민당 정부 역시 장기화된 중일전쟁에 따라 광복군에 충분한 지원금을 제공할 수 없었다. 군사훈련은 물론 군복과 식량 보급 문제로도 시달리는 광복군을 임시정부는 가만 지켜볼 수 없었다. 때마침 미국정부 가 1941년 3월 발효한 ‘무기대여법’을 통해 일본 등 추축국에 대 항하는 연합국 국가들에게 군자금을 지원해준다는 방침이 임시 정부에는 희소식으로 다가왔다. 이처럼 중국군사위원회의 방침에 따른 광복군의 자주권 결 여 문제와 자금부족 현상은 임시정부가 미국이라는 활로를 모 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 당시 한국측 대표들과 중국 국민당 대표들(1940.9.17). 왼쪽 두번째 지청천 광복 군 사령관, 그 오른쪽이 김구 주석, 중국군 대표 류지 (劉峙) 장군 조소앙이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 보낸 외교 공한 (1941) 좌우합작 통합을 이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34회 기념 사진(1942.10.25, 앞줄 왼 쪽에서 다섯번째가 김구, 오른쪽 끝이 김원봉, 2열 왼쪽에서 네번째가 조소앙, 그 뒷 줄 오른쪽이 김성숙(이상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