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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박상진 선생은 반민족적 지주들을 응징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무력적 방법으로 군자 금을 모으고, 그것으로 독립군 기지를 개척한 후 여기에서 독립군을 양성해 민족독립을 달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혁명적 독립항쟁단체의 결성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선생을 비롯한 조선국권회복단의 의병 계열 인사들은 1915년 7월 15일 풍기광복단과 제 휴해 대구에서 대한광복회를 조직했다. 조직원들의 성향과 투쟁 방향이 비슷한 두 단체였기에 대한 광복회의 탄생이 가능했다. 대한광복회는 우선 군자금을 조달해 만주에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여기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 편 국내외 요지에 독립항쟁거점을 확보하여 정보, 연락망을 구성한 뒤, 무력으로 민족독립을 쟁취하 려고 했다. 또한 일제타도의 계획을 추진하는 행동강령으로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의 4개 항목을 추 구했다. 친일 부호를 처단하고, 군자금 모집 등 의열투쟁 전개 박상진 선생은 대한광복회 초대 총사령에 추대됐다. 대한광복회는 창립 이후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선 생이 설립한 대구의 상덕태상회를 본거지로 하여 전국 각지와 국외에 곡물상점을 경영하면서 군자금을 마련하 는 한편, 정보, 연락망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대한광복회의 군자금은 주로 자산가들의 의연 금으로 충당하고 있었는데 부호들의 비협조와 친일 부호 들의 밀고로 모집이 더욱 어려워졌다. 이 같은 상황이 전 개되자 선생은 군자금 강제 모집 방법을 시작하는 한편 이를 위해 만주에서 무기를 구입해 들여오기 로 한다. 1916년 만주에서 구입한 권총을 들여오다가 서울에서 일본 경찰에게 발각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출옥 후 군자금 강제모집을 계속하면서 1917년 11 월 전경북관찰사며 친일부호 장승원 처단에 이어 1918년 1월 충남 온양 악덕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한 후 조직이 탄로나 선생은 일본 경찰에게 체포당했다. 하지만 이 활동으로 일본 경찰은 대 한광복회 색출에 총력을 기울였고 조직이 탄로돼 선생은 일본 경찰에게 체포당했다. 이때 박상진 선생은 포박을 거부하고 기르던 백마를 타고 갔다고 한다. 이후 대구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 고 4년 간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3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고헌 박상진의사께서 일경에게 압송 되어 가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