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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 독립장│박상진(朴尙鎭) “오인(吾人)은 대한독립광복(大韓獨立光復)을 위하여 오인의 생명을 희생에 공(供)함은 물론, 오인이 일생의 목 적을 달성치 못할 시는 자자(子子) 손손(孫孫)이 계승하여 수적(讐敵) 일본을 완전 구축하고 국권을 회복할 때 까 지 절대 불변하고 결심 육력(戮力)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서고(誓告)함” - 1915년 선생이 주도한 대한광복회의 결의문에서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던져버린 판사직 박상진 선생은 1884년 12월 7일 경상남도 울산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전 통적인 유가 가문에서 출생한 선생은 일찍부터 한학을 배웠다. 특히 선생은 1895년에 의병을 일으켰 던 허위의 문하에 들어가 1902년부터 수학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웠다. 하지만 선생은 봉건지배질서를 고수하려는 사상에 빠져있지는 않았다. 평리원 판사와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봉건의식에서 벗어난 것도 그 이유였는데, 생활 태도는 유림의 방식을 따랐지만, 사고방 식에서는 근대적 신학문을 거부하지 않았다. 1907년 양정의숙 전문부 법과에 입학해 법률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등으로 우리나라가 일제의 준식민지 상황이 되자 선생의 스승인 허위가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전국 의병부대의 연합체인 13도창의군을 지휘하면서 서울진공전을 수행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1908년 6월 일제에 잡혀 같은 해 10월 순국했다. 강력한 의열투쟁 전개한 대한광복회 초대 총사령관 혁명적 독립항쟁단체인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의열 투쟁을 전개했다. ● 1884년 12월 7일 경상남도 울산 출생 ● 1912년 대구에서 상덕태상회를 설립해 독립항쟁의 거점 마련 ●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 참여, 대한광복회 총사령 ● 1917년 친일 부호 처단 및 군자금 모집 활동 등 의열투쟁 전개 ● 1921년 8월 13일 대구 형무소에서 사형, 순국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핵심공적 주요약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