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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1910년대 국제정세와 2 · 8독립선언 25 과 ‘극동 먼로주의’에 맞서서 ‘새로운 아시아(新亞)’ 를 모색하는 운동들이 이어졌다. 세게대전 이전이 었지만, 1912년 동제사(同濟社)의 자매단체 격으로 이미 신아동제사라는 단체가 만들어진 바 있었고, 1915년에는 제국 일본의 심장부 도쿄[東京]에서 유 학생 청년들이 민족을 뛰어넘어 ‘신아동맹당(新亞同 盟黨)’이라는 단체를 구성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일 본 제국주의에 맞서 새로운 아시아를 건설할 것을 모토로 내세웠다. 1917년에는 다양한 국제회의에 참석해서 조선의 독립을 추진하였다. 미국 뉴욕에서 열린 소약(小弱) 국민동맹회의에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주 도로 박용만이 한인대표로 참석했고, 스톡홀름에서 열린 만국사회당 대회에는 조소앙 주도로 한인사회 당 명의의 문서가 제출되었다. 소약국민동맹회의나 만국사회당 대회는 요동치는 세계 질서에 큰 영향력 을 행사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대회에 참가해서 독립의지를 표명한 것 이상 의 결 과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들 역시 세계 의 격동 속에서 독립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들이었다. 전쟁 종결 후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기대와 논쟁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항복하였다. 이제 새 로운 방략을 탐색해야만 했고, 이때 주목받은 것 이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Self- determination)’이었다. 윌슨은 1918년 1월 8일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 서 전후처리방침으로 ‘14개조(Fourteen Points)’를 제시했다. ‘14개조’ 제의 중 5조의 내용이 ‘민족자결 주의’라고 통칭되었다. 하지만 5조의 내용은 식민지 의 즉시 독립으로 직결되는 내용도 아니었고 그것을 ‘민족자결주의’라고 부르는 것에도 일정한 의문이 존재했다. 또 방침 제6조부터 제13조까지의 항목에 서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적용될 구체적 대상 지 파리 강화 회의에서의 윌슨과 협상국 주요 4개국 정상들. 왼쪽부 터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 비토리오 오를란도 이탈리 아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나무위키 제공) 일제 당국이 파악한 한국인 신아동 맹당원 명단(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신아동맹당원으로 2 · 8독립선언의   확산과 3 · 1운동 발발과정에서 중 요한 역할을 한 장덕수(위키백과 제 공). 그는 일제 말기 변절하여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