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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함경도 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의 역사적 의의 25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두번째로  개항된 함경도 원산은 일본의 침략 과 서구 문물이 유입되는 최전선이 었다. 개신교가 전래되는 가운데 변 화의 조짐이 서서히 감지되기 시작 했다. 선교사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선교활동에 매우 열성적이었다. 의 료활동과 교육활동에 치중된 선교사 업은 주민들 인식이나 가치관을 변 화시키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함경도 출신으로 서울에서 활동하던  전 · 현직 관료와 계몽론자 등은 한북 흥학회와 서북학회를 중심으로 계몽 운동에 앞장섰다. 대표적 인물은 이 용익 · 이준 · 이동휘 · 오상규 · 이종호  등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과  1905년 을사늑약은 문화민족임을  자부하던 한민족에게 식민지화에 대 한 위기의식을 증폭시켰다. 이에 따 라 국권회복운동은 크게 의병운동,  계몽운동, 국채보상운동 등으로 전 개되었다. 왜 함경도에 주목해야 하는가 조선은 1876년 강화도조약(일명 병자수호조약) 체결 이후 더 이상 “조용한 아침의 나라(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나 은 둔국(隱遁國, Hermit Nation)”이 아니었다. 비록 불법적인 강요에 의한 개방이라는 한계는 있으나, 국제사회 일원으로 등장하는 결정적인 계 기였다. 더불어 부산‧원산‧인천 등지를 비롯한 개항장이나 수도 서 울에는 외국인 ‘전용 거주지인’ 조계지(租界地)가 형성되었다. 외국인이 먹는 음식물이나 생활방식은 우리와 너무나 달랐다. 더욱이 ‘남녀칠세 부동석’이 절대적 가치관인 상황에서 외국인 생활방식은 엄청난 충격 파였다. 두 번째로 개항된 함경도 원산은 일본의 침략과 서구 문물이 유입되 는 최전선이었다. 개신교가 전래되는 가운데 변화의 조짐은 서서히 감 지되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선교활동에 매우 열성 적이었다. 대다수 주민은 의구심이 가득 찬 눈초리로 이들을 바라보았 다. 빈번한 접촉에 따라 경계심은 반전되어 점차 호기심으로 변화되었 다. 의료활동과 교육활동에 치중된 선교사업은 주민들 인식이나 가치 관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과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은 문화민족임 을 자부하던 한민족에게 식민지화에 대한 위기의식을 증폭시켰다. 이 에 따라 국권회복운동은 크게 의병운동, 계몽운동, 국채보상운동 등으 1904년 경 함남 원산항 전경 1900년대 초 북청읍내 전경(이상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