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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을 위해 미국과 외교를 시도하다 25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광복 후 세계  열강이 한반도의 주인이 되지 않고,  임시정부 스스로가 주체적인 목소 리를 내기 위해 국군인 한국광복군 을 1940년 9월 17일 창설했다. 그 리고 광복군을 위해 꾸준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임시정부가 제안 한 OSS의 한국인 대일전쟁 활용 계 획은 여러 차례 난관에 부딪혔다. 하 지만 임시정부와 광복군 측은 OSS 와의 협력에 지속적으로 분투했다.  이는 결국 1945년 3월 OSS와“작 전명, 독수리(독수리작전, Eagle  Project)”로 발전되었다. 임시정부는  그 어느 나라에 종속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자주적이고 힘있는 국가 만 들기를 목적으로 열악한 시대적 상 황에도 물러서지 않고, 최강대국인  미국과도 손을 잡고 위기를 해쳐나 가려 했다. 이것이 바로 임시정부의  일관된 외교 자세였던 것이다. ‘독립군’으로 살고 죽고 싶었던 한국광복군의 비원과 임시정부의 선택 1942년 8월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치르던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 비서 엄항섭(嚴恒燮)의 호소가 미국 워싱턴에 닿았다. “중국의 제국주의적 경향을 알리고, 미국인의 동정심을 자극시키고, 지속적으로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고, 연합국의 군사작전에 가능한 한 임시정부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이 내용은 엄항섭이 임시정부 산하에 있는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李承晩)에게 전달한 것이었다. 이러한 호소의 경위는 거슬러 올 라가면 이러했다.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십 년간 절실히 염원했던 국군을 중국 충칭(重慶)에서 창설했다. 대한민국의 국군 자격으로 대일 전쟁에 참전하기 위함이었다. 충칭 한국광복군총사령부 본부에 이어 제1지대(조선의용대가 개편), 제2지대, 제5지대(1942년 제2대에 편입), 제3지대(1945년 징모 6분처를 개편)가 중국 관내(關內) 각기 다른 지역 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한국광복군의 활동에는 늘 제약이 있었다. 바로 중국 국민당 정부 산하 중국군사위원회의 간섭을 받는 데서 뒤따라온 문제였다. 광복군은 중국의 활동지원금을 받는 입장이라 중국 국민당 측의 요 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광복군은 1941년 11월 중국군사위원회가 요구한 「한국광복군 활동 9개 준승(準繩)」에 따라 독자적 활동이 제한 되었다. 적의 정보를 수집하고, 광복군 활동을 적과 동지들에게 선전‧ 홍보하고 포로 신문을 하는 등으로 활동이 국한되었다. 광복군이 적 과 전투를 하려면 중국의 승인과 협조가 필요했다. 이른바 9개 준승은 1944년 11월 폐지되었으니, 임시정부에서 이것의 폐지를 중국 측에 간 곡히 요청한 것이 받아들여지는데 3년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중국군사위원회에 따른 활동제약에도 불구하고 한국광복군은 연합 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쟁에 공헌하고자 치열하게 노력했다. 엄격한 군 기 하에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일부는 인도‧미얀마 전선에 파견돼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