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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횃불을 올려 잠자고 있는 민족혼을 깨우자 열사는 상해에서 은사인 백범을 다시 만난다. 당시 백범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警務局 長)이었다. 나석주 열사는 다시 스승의 지도를 받으며 독립항쟁을 계속했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원, 의정원 근무와 함께 의열단에 가입해 폭파 활동과 군자금 모집 활동에 나섰다. 뿐만 아니 라 이동휘가 세운 무관학교 등에서 전략전술을 연마했다. 그해 5월 김창숙 선생과 김구 선생은 국내외 정세를 토론하며 독립항쟁의 방향을 함께 모색했 다. “지금 횃불을 올리지 않으면 잠자고 있는 민족혼을 영원히 깨우지 못한다. 일정기관과 친일부 호를 박멸하여 국내 동포의 잠자는 정신을 일깨워야 한다”는 의견에 일치를 보았다. 실행할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었다. 김구 선생이 먼저 나 석주와 이화익을 추천했다. 김창숙 선생은 천진으로 떠나 두 명의 조선 청년과 만나 계획을 설명 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하겠다며 나섰지만, 김창숙 선생은 나석주 열사를 선택했다. “백범도 그대의 장도를 학수고대하고 있소. 민족의 고혈을 빨고 있는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 가 그대의 손에 폭파되는 날 일제의 간담이 서늘할 것이며, 잠자고 있는 조선의 민족혼이 불길처 럼 다시 타오를 것이오. 대의를 위해 무운을 비는 바이오.” 단신으로 귀국하여 서울로, 식산은행에 폭탄 투척 나석주 열사는 예전에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고향을 떠난 것을 아쉬워했다. 거사를 치르기 전 고향을 방문하고자 했지만, 그 인근은 일제의 경비가 삼엄한 곳이라 방문하지 못하고 발길을 서울로 향했다. 열사는 마중덕이라는 중국인으로 위장해 남대문 근처에 있는 동춘잔(同春棧)에 투숙했다. 고국으 로 돌아온 마지막 밤이었다. 1926년 12월 28일 날씨는 투명했으나 겨울바람은 차가웠다. 나석주는 아침밥을 든든하게 먹고 낮이 될 때까지 거리를 배회했다. 그날 오후 2시 5분. 나석주는 식산은행으 로 들어가 대부계 철책 너머의 뒷벽 기둥에 폭탄을 던졌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불발탄이었다. 오랜 기간 보관하면서 뇌관에 녹이 슬었던 것인지 폭탄이 던져졌다는 것조차 아무도 눈치채지 못 해 나석주 열사는 식산은행의 정문을 걸어 나 왔다. 서울 을지로에서 일본 경찰들과 총격전 끝에 장렬하게 자결 동양척식회사로 향한 나석주 열사는 들어서자마자 일본인 1명을 권총으로 사격하고, 2층으로 뛰 어 올라가 또 다른 일본인에게 총을 쐈다. 놀라 도망가는 토지개량부 간부들을 쓰러트리고 기술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