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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안동 영호루 옆에 세워져 있는 김지섭 선생 기념비 일본말에 능숙하고 일본인과 비슷하게 생겨서 최적임자”라며 일본파견에 자원했다. 그러나 폭탄을 지니고 일본에 잠입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으며 일본에는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적 의 심장부인 동경 국회의사당에 들어가는 것은 더 어려웠다. 일본 동경으로 가서 불확실한 거사계획 을 성사시키기 위해 윤자영은 일본인 친구인 고바야시 히라쿠(小林開)를 소개해줬다. 일본인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꺼림칙했지만, 고바야시 히라쿠의 소개로 그의 형이 선원으로 있 는 배에 아편을 밀수하는 일본인으로 위장해 탑승했다. 하지만 오랜 항해로 몸이 쇠약해졌고 여비도 거의 떨어졌다. 일본 왕궁에 던진 폭탄, 일본 전국에 일제의 만행을 알리다 자신의 시계, 외투 등을 모두 전당포에 맡겨 마련한 교통비 로 동경에 가던 의사는 오사카에서 의회가 휴회했다는 신문 보도를 봤다. 언제 다시 개최한다는 정보를 얻을 수 없었고 여비도 떨어져 때를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숭배하는 왕궁 부근에 폭탄을 던지면 일제의 침략상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고 한국의 독립 의지 를 세계만방에 호소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성공한다 면 제국의회의 거사보다 더 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판 단했다. 동경에 도착한 의사는 근처를 답사한 후에 왕국을 향해 폭 탄을 던졌으나 불발되고 말았다. 몰려오는 경비병들을 보고는 자폭하고자 남은 폭탄을 발치에 떨어트렸으나 그것마저도 불 발이었다. 비록 거사는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이 사건이 일제 에 주는 충격은 실로 엄청나, 당시 신내각 조직을 중단했고 내 무차관을 견책했으며 경시총감 등 경찰 수뇌부를 경질했다. 재판장에서 총독정치의 악랄성과 비인간성을 폭로하고 동 양척식의 착취와 동포생활의 빈곤을 들어 일제의 학정을 통 박한 다음 한국 사람은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선언서에서도 명시한 바와 같이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항쟁할 것이라며 열변을 토했다. 3차에 걸친 공판 후 동년 11월 6일 동경지방재판소에서 무 기징역을 받았다. 지바 형무소에서 복역 중 1928년 2월 20일 감옥에서 순국하니 당시 향년 4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