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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43 김익상 의사의 판결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 사살 시도 조선총독부 폭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변화 는 전혀 없었다. 김익상 의사는 재차 의거를 결 심했다. 마침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 中義一)가 필리핀을 방문한 뒤 3월 28일 상해로 온다는 보도가 있었고 의사는 다나카를 처단하 기로 했다. 3월 28일 오후 3시 30분에 오성륜과 김익상 의사 그리고 이종암이 차례로 다나카를 공격했 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의거 직후 오성륜은 현 장에서 체포됐고, 의사는 추격하던 영국 경찰이 쏜 총탄에 맞고 중국 순경에 붙잡혔다. 이종암 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이송 중 오성륜이 감옥을 탈출하자 일제는 김 익상 의사를 곧바로 상해에서 나카사키로 압송 했는데 이는 탈출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김익상 의사는 재판정에서 “제2 김익상, 제3 김익상이가 뒤를 이어 나타나서 일본 대관 암살을 계획하되 어디까지든지 조선독립을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 니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주눅 드는 바 없이 재판을 받았다. 결국, 김익상 의사는 나카사키 공소원에서 사형을 선 고받았다. 이후 의사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다시 20 년 징역으로 감형되어 21년의 오랜 옥고를 치르고 2차 대전이 한창이던 때에 50세의 나이로 귀향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일본인 고등경찰이 연행해 가더니 어디선 가 암살되고 만 것인지 종적이 묘연해졌다. 1922년 6월 30일 일본 나가사키의 재판정에 선 김익상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