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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입학하지는 못했다. 김익상 의사는 낙담하여 북경으로 갔다. 여기서 그의 인생을 크게 바꾼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나게 된다. 의열단에 가입한 김익상 의사, 총독부 공격을 위해 귀국 의열단은 1919년 11월 창단된 이후 본격적으로 대규모 파괴 투쟁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1921년에는 더욱 대담하게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 폭파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김원봉은 “조선의 독립은 2천만 민족의 10분지 8 이상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우리는 이때 선두에 나아가 희생이 됨이 마땅하다“는 말에 감복 받아 의열단에 가입했고 조선총독부 폭파 임무를 맡게 됐다. 김익상 의사는 1921년 9월 9일에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2개와 권총 2정을 건네받고 즉시 조선총독 부 폭파 의거를 실행하기 위해 북경을 떠나 서울에 도착했다. 의사는 일본 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가는 일본 여자와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면서 교묘히 부부행세를 하여 기차 안에서 검 문을 피했다. 폭탄과 권총을 몸에 지니고 있어 여러 가지로 행동이 불편했지만, 남대문 역에서는 동행하던 일 본 여자의 3살짜리 아이를 안고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 서울에 도착한 뒤 아우 김준상의 집을 찾 아가 하루를 묵었다. 다음 날 아침 의사는 일본 전기 수리공 차림으로 남산 왜성대의 조선총독부 청사로 갔다.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유유히 빠져나오다 9월 12일 오전 10시 20분경 전기시설 수리를 위해 온 것처럼 대담하게 조선총독부 청사로 들어가 먼 저 2층에 있는 비서과에 폭탄을 던지고, 이어 회계과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 지 않았으나 회계과에 던진 폭탄은 일시에 광음을 내며 폭발했다. 회계과에 던진 폭탄이 맹렬하게 폭발하여 15센티나 되는 깊이로 마루바닥이 파였고, 파편은 벽과 아 래층으로 튀어 응접용 탁자가 부서지고, 유리창이 깨지고 여러 개의 책상과 걸상이 파손되는 등 식민 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 청사는 온통 아수라장이 됐다. 일제가 3.1 운동 이후 소위 ‘문화통치’를 펴 식민통치체제가 안정되어 가고, 더 나아가 식민통치에 대 한 한국인들의 반감이 수그러져가고 있다는 선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렸다. 범인을 잡기 위 해 몰려든 헌병에게 의사는 “2층으로 올라가면 위험하다”는 말을 남기고 유유하게 조선총독부 청사를 빠져나왔다. 의거 직후 의사는 이태원의 아우 집으로 돌아왔고 이튿날 평양으로 몸을 피했다. 여기서 다시 일본 의복 으로 변장해 국경을 벗어난 뒤, 9월 17일에 북경에 도착하여 약산 김원봉을 만나 의거 사실을 보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