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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39 1913년에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 유창순, 한훈 등과 함께 비밀결사 광복단을 조직했다. 1916년 전라남도 보성의 조성헌병대를 기습하고 친일 분자 2명을 처단했다. 1919년 3.1만세운동 을 겪으면서 전국 각지에서 울려 퍼진 독립만세의 함성은 한 청년에게 인생의 목표를 독립항쟁이 라 정하는 커다란 계기가 됐다. 그해 4월 1일 동대문교회 내 영국인 피어슨 여사의 집에서 박노영, 윤익중, 신화수, 정설교, 전 우진 등 청년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 혁신단을 조직했고 첫 작업은 항일지하신문 <혁신공보> 발행이었다. 김상옥 의사는 신문제작의 재정지원을 맡는 한편 배포책임자로 독립항쟁의 일선에 서 활동했다. 평화적 노선에서 무력투쟁을 통한 독립 쟁취로 재정적인 어려움과 인쇄시설 압수로 신문발행은 11월 경 중지된다. 그 중간에 김상옥 의사는 일본 경찰에게 잡혀 고문을 받았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때 의사는 평화적인 방법의 독립항쟁이 가지는 한계를 절감하고 무력투쟁을 통한 독립 쟁취를 실행하고자 결심한다. 마침 1920년 1월 초순, 만주에 있는 독립군단체인 북로군정서에서 파견된 김동순과 상해에서 온 광복단 결사대 한훈을 만나 무력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하면서 그의 결심은 더욱 굳어져 갔다. 같은 해 4월, 김동순, 윤익중, 서대순 등과 함께 암살단을 조직하고 실행행동책, 무기공급 책, 재정책, 비밀문서책, 집총대장 등의 부서를 갖췄다. 김상옥 의사는 군자금 모집에 힘쓰는 한편, 별도의 의열투쟁을 계획해 권총 40정, 탈환 3천 발 을 휴대하고 입국한 광복단결사대의 한훈과 1920년 8월 24일 미국의원단의 방한을 계기로 조선 총독을 비롯한 일제고관의 주살과 적의 기관 파괴 등을 실행하여 국제여론을 환기하는 활동을 진 행하기로 계획했다. 칩거보다는 적극적 활동을 위해 서울로 돌아오다 그러나 거사 당일 오전 가택수색을 당하고 한훈이 일본 경찰에 잡혀 뜻을 이루지 못한 김상옥 의사는 일본 경찰의 추격을 피해 그해 10월 중국 상해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된다. 상해 임시정 부에서 자신의 안목을 넓혀갔고 의열단에 가입했다. 상해에서의 생활은 의미 있었지만, 칩거보다 밖에서의 활동을 더 원했던 김상옥 의사에게는 맞 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때를 만들어가기를 원해 동지들과 상의한 끝에 1922년 11월 말, 안홍한과 함께 나무 상자에 권총 4정과 탄환 8백발 그리고 항일문서 등을 가지고 상해를 출발 12 월 1일 서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