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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025년 2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2 · 8독립선언을 다시 본다’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국의 시대’가 균열하기 시 작하면서 생겨난 대립의 틈새 속에서, 식민지 상황 속 한국인들은 ‘독립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독립운 동의 공간’을 확보해나가고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한국독립운동 1910년대 초반 러시아 한인 사회에 기반을 둔 반 일단체인 권업회(勸業會)와 제2차 러일전쟁의 발발 을 기대하며 1914년에 조직된 대한광복군정부는 러 시아와의 연대 속에서 한국 독립을 전망했다. 하지 만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일본과 러시아는 연합군 측에 함께 참전했고 러시아가 권업회를 해산 시키면서 독립을 위한 국제적 연대는 재설정되어야 했다. 러시아를 대신할 존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 다. 바로 독일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형 성된 ‘독일 대(對) 일본’의 대립구도는 독립운동의 국 제적 연대 대상을 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15년 3월 조직 중이던 신한혁명당 당원들은 한국독립 에 대한 후원을 얻기 위해 독일 정부와 접촉하고자 노 력했고,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인청년단체도 독일의 군사비를 보조할 목적으로 2만 달러를 기증하였다. 일본에 유학 중인 조선인 청년들도 하와이의 사례를 본받아 독일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벌일 계획 을 논의하였다. 국내에서는 1917년 겨울에 제주도인인 김시학 주 도로 임규, 신익희 등이 모여 본격적으로 독립을 매 개로 한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독일에 독 립청원을 하기 위해 국내외 대표 만여 명의 서명을 받는 운동을 추진한 것이다. 이후 여러 차례의 회의 를 거듭하여 송진우와 김윤식을 중심으로 사회 각계 각층을 망라하자는데 의견이 일치되었다. 그리고 교 섭을 진행하였는데 1918년 11월에 독일이 항복하면 서 이 계획은 좌초하고 말았다. 독일 외에도 다양한 연대 활동 타진이 이루어졌 다. 특히 중국과의 연대는 일본에 의한 ‘동양평화론’ 제1차 세계대전 도중 한 유럽 전장의 모습. 지루한 참호전이 장기간 지속되어 대규모 인명피해를 낳았다. 이른 바 ‘민족자결주의’ 등 14개조의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처리방침을 제시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나무위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