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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의내부 오위도총부도총관 진산군의 묘
진산군은 서기 1584년 3월 11일 덕흥대원군(선조의 부친)의 다섯째 손자로 태어나셨다. 아버님이 하원군(헌록대부 선조조 호종공신)이시며 이조 14대 선조임금이 숙부가 되신다. 어머님은 현부인 진산이씨이시며 진산군묘 우측 건너편 집뒤 능마루에 묘사 계시다. 진산은 어려서부터 총명다재하고 글읽기를 좋아하여 재지와 덕의을 쌓고 위품이 뛰어나 십여세에 부정(副正) 이십여세에 도정(都正) 사십여세에 도총관(都摠管)에 병자호란 평전직후 君(군)에 오르셨다. ㅁ진산은 충효정신이 투철하기로 이름 높은 분이다.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임금께서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기게 되니 진산은 진성, 진양 두 아우와 함께 이른 아침부터 대궐에 나아가 황급히 파란행차를 서둘러 위기에 대처할때 진산은 임금의 피란대열 뒷전에서 보살피다가 불행히도 적병에게 잡혀 호장(胡將)이 칼을 뺴어 혹독히 심문할때 진산은 충절의 의지를 끝내 굽히지 않고 상대를 설득하니 호장도 이에 감명하여 진산을 이내 방면하였으니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누구나 다 감탄하였다. 임금께서 난을 거두시고 환궁하신후 진산과 두 형제에게 군(君)을 봉하신후 국사를 맡기시니 성군의 뜻을 받들어 충성을 다하니 나라가 크게 평안하였다. 나라(인조조)에서 진산의 충성을 칭찬하여 전답과 산지를 내려 후세에 이으도록하니 진산의 영예로움이 더 이를바 없고 그 은총이 후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진산군의 초취배위는 현부인 고령신씨로 일찍 돌아가시니 (한양거주) 고양땅에 장례 모셨으며 재취배위는 현부인 나주나씨이니 어른께서 성품이 유순단정하고 집안을 의범으로 다스리고 자손을 의방으로 교훈하시며 동기간에 우애가 넘쳐 婦道(부도)의 의표가 되셨으며 슬하에 영안군 금안수 위안수 세 아들과 두 따님을 두셨댜.1996년 9월 17일 이곳 후손들의 주선으로 현부인 고령신씨를 고양땅에서 이곳으로 이장 3위합장으로 모셨으며 진산군 후손이 전국에 번성하여 그 수를 헤아릴수 없고 음10월 7일 진산군 시제에는 후손들로 성시를 이룬다.
사단법인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덕흥대원군 진산군파 청계종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