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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37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해군 함대 사령관인 노무라(野村) 중 장, 우에다(植田) 중장, 주중공사 시 게미쓰(重光), 일본거류민단장 카와 바다(河端), 상해총영사 무라이(村井)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 오전 11시 40분쯤, 참석한 외교관과 귀빈들이 떠나고 단상엔 일본 측 인사만 남았다. 축하연이 시작되기 전 일본 국가가 시 작됐다. 11시 50분, 윤봉길 의사는 물통형 폭탄의 안전핀을 빼 서 단상 위로 폭탄을 투척했다.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음으로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중 국 국민당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 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폭 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침체일로에 빠져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항쟁의 구심체가 된 계기를 마련하 게 된 것이다. 윤봉길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그해 5월 25일 상 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 와(金澤)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가나자와 노다산 공 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밑에 봉분도 없이 묻혔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 품으로 돌아와 효창공 원에 안장되었다. 일본 이시가와현 가나자와시에 있는 윤봉길 의사 순국비 윤봉길의사가 투척한 도시락 모양의 폭탄 거사 3일 전의 태극기 앞 선서(왼쪽)와 선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