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page

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33 를 배우고 말타기와 활쏘기 사격술 등을 익히며 무예를 연마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자 안중근 의사의 부친은 개화정책을 펴던 갑오내각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여 반동학군 투쟁에 나섰다. 안중근 의사도 16세의 나이로 부친이 조직한 군대에 참여 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처음으로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안중근 의사의 평생 지표, ‘박애주의’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개화파 정부가 전복되고 친 미·친러 연립내각이 성립되며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안중 근 의사의 부친은 인근의 천주교당으로 피신했고 이때의 인연으로 가족이 전부 천주교에 입교했다. 안중근 의사는 이때부터 천주교의 핵심 교리인 박애주의를 평생의 지표 로 삼았다. 1906년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하면서 민족의 실력양 성을 위해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계몽운 동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석탄을 채굴하여 판매하 는 삼합의라는 광산회사를 평양에 설립하여 산업 진흥에 힘썼으며 국채 보상 운동에도 참여했다. 이듬해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이어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키며 대한제국을 식민지 화하여 갔다. 이런 상황을 본 안중근 의사는 1907년 북간도를 거쳐 노령 연해주로 망명했다. 노령 일대에서 펼친 의병 활동 안중근 의사는 노령 일대의 한인촌을 유세하며 의병을 모집하고, 최재형의 재정적 지원으로 1908 년 봄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의병부대의 규모는 3백 명 정도로 두만강 부근의 노령 연추를 근거지로 군사훈련을 실시했고 1908년 6월 의병부대를 이끌고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 상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수비대를 급습했다. 같은 해 7월 함경도 일대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홍범도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함경북 도 경흥 부근과 신아산 일대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했다. 이때 사로잡은 일본군을 석방했는데 만국 공법과 천주교의 박애주의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부대의 위치가 알려져 일본군의 공격 을 받아 대패하고 말았다. 사형 직전에 어머니가 준 옷을 입고 있는 안중근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