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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강우규 선생 의거지 (현 서울역 광장) 었다. 이후 강우규 선생의 행적을 보면 젊은 청년 안중근과 같은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엿보인다. 경술국치를 맞이하게 된 강우규 선생은 독립항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1911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있는 화룡현 두도구로 옮겼다.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순방하며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항 쟁방도를 모색했다. 사립광동학교의 설립으로 민족의식과 동포애 고취 독립항쟁의 산실을 마련하고자 했던 강우규 선생은 1915년 길림성 요하현으로 이주했다. 이곳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신흥동이라 명명하고 본격적인 독립항쟁거점으로 성장시켜 나갔다. 독립항쟁의 기반은 교육. 선생은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했다. 광동학교는 청소년들의 민족의 식을 고취하고 동포애를 심어줬다. 1년 만에 100여 가구가 사는 마을이 된 이곳은 만주 각지의 독립 항쟁세력을 연결하는 거점으로 성장해 나갔다. 몇 년 간 차분히 독립항쟁을 준비하던 강우규 선생은 3.1 운동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듣고 바로 사람들을 학교에 모아서 인근 지역에서 만세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그 정도의 시위로는 독립이 이 루어지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진정한 독립을 위한 방법을 고민하던 그는 3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하여 요하현 지부장을 맡게 되었다.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은 실전에 참여하는 청년들을 지원하는 단체였다. 하지만 의사를 꿈꾸는 강우규 선생에게 뒷자리는 답답하기만 했다. 미리 준비한 폭탄으로 총독 제거를 결심 강우규 선생은 3.1 운동이 일어나기 몇 주 전, 언젠가 사용하리라 생각하며 폭탄을 하나 사들였다. 폭탄을 쓸 일은 금방 생겼다. 일본은 3.1 운동을 계기로 무단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식민 정책을 바꾸었다. 그는 우리나라를 영구히 식민지로 삼으려 는 술책이라 생각해 새로 부임하는 조 선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를 사살하기 로 결심했다. 6월 14일, 가지고 있던 폭탄을 가지 고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원산항 을 통해 국내에 들어왔고 다른 독립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