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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1910년대 국제정세와 2 · 8독립선언 23 미국 대통령 윌슨은 1918년 1월 8 일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전후 처리방침으로 ‘14개조’를 제시했다. ‘14개조’ 제의 중 5조의 내용이 ‘민 족자결주의’라고 통칭되었다. 하지 만 이는 식민지의 즉시 독립으로 직 결되는 내용도 아니었고 그것을 ‘민 족자결주의’라고 부르는 것에도 일 정한 의문이 존재했다. 윌슨의 ‘14개 조’는 발표 직후 『신한민보』와 『매일 신보』 등을 통해 국내외 조선인들에 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한인 사회에서는 윌슨의 ‘14개조’와 파리 강화회의에 대해 다소 냉정한 태도 를 보였다. 일본 조선인 유학생 사회 의 반응도 비슷했다. 그럼에도 일본 과 미국, 중국 상하이와 국내에서 파 리강화회의 대표파견과 2 · 8독립선 언, 3 · 1운동이 이어졌다. 그것은 한 국인 등 식민지 민족들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후질서 논리를 전취하여 스스로 세상을 변화시킬 토대를 마 련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식민지 조 선의 대표들은 ‘완전하고 투철한 민 족자결주의의 실제적 승리’를 주장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10년대 격동하는 세계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었다. 1910 년대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좌절의 시간, 이제 막 ‘식민지화’된 순간이 었지만, 세계는 혁명, 전쟁, 식민지 독립 등 변화가 시작된 시점이었다.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1917년 러시아혁명 등 역사적 사건이 이어지면서 ‘제국의 시대’를 구가했던 열 강들의 입장에서는 제국 사이의 균열이 본격화되어 충돌하고 파탄에 이르렀다. 제국주의 세계체제를 이끌었던 대영제국의 ‘팍스 브리타니 카(1815~1914)’가, 유럽사에서는 이른바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의미 의 ‘벨 에포크(Belle Epoque)’가 그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 의 변곡점에 제1차 세계대전이 존재하였다.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 사라예보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세 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란치프(Gavrilo Princip)가 쏜 총에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대공이 암살당했다.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의 서막이었 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914년 7월 28일, 세르비아에 대해 오스트리 아 · 헝가리 제국이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처음 전쟁은 유럽에서 전쟁이 시작되었고 전장도 주로 유럽에 한정되었다. 그러다 1914년 8월 한 달 동안 각국의 동맹 관계 속에서 러시아, 독일, 프랑스, 벨기에, 영국, 몬테네그로, 일본 등으로 참전국이 확장되어갔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있는 유럽의 식민지들에도 전쟁의 여파는 고스란히 전 해졌다. 캐나다, 인도, 호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사람들도 식 민지 본국의 군대에 가담하거나 식민지 본국에 맞서 전쟁에 합류하였 다. 동아시아에서는 독일의 동아시아 최대 근거지였던 중국 칭다오[靑 島]와 적도 이북 독일령 남양군도에서 독일과 일본의 충돌이 일어났다. 일본이 1914년 10월 14일 적도(赤道) 이북의 독일령 남양군도(南洋 群島)와 11월 7일 칭다오를 점령하면서 동아시아에서의 대전은 사실 상 이것으로 끝났다. 개전 후 불과 3달도 안 되었다. 이후 일본은 아시 아 지역에 대한 독일의 권익을 계승하면서 동아시아의 패권국가로 자 리 잡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본격적인 열강의 견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