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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독립전쟁 50년의 거룩한 울림 ▶ 정미의병 최대격전지 삼산리 1907년 11월 4일 서울을 출발한 사카베소좌의 서울 토벌대는 고안(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양근 (지금의 양평읍소재지)을 경유하여 11월 6일 양평의 광탄에 도착하여 대기하다가 11월 7일 새벽을 기하여 기습적으로 구둔치를 넘으려 했으나 그 곳을 지키고 있던 150여 의병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일본군은 의병이 강력히 응전함으로써 일시적으로 퇴각하였다가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2시간에 걸쳐 포병의 지원을 받아 산포공격을 집중했다. 구둔치를 통과하여 설매실과 섬실에 있던 의병부대를 시작으로 삼산리 본진까지 공격하여 궤멸시키려 던 서울토벌대의 작전계획은 어긋나고 말았다. ▶일본군의 삼산리 포위작전 13도창의대진소 의병진의 1차 집결장소인 양평의 양동지역은 평해로(平海路) 길목에 위 치한 지역으로 높은 산줄기가 에워싼 산악지대 가 많은 분지형(盆地形)의 지형적 특징을 가지 고 있다. 서쪽으로 여주와 동쪽으로 횡성과 남쪽으로 원주와 접해있고, 서울까지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하루면 이동이 가능한 곳이다. 인근지역에서 의병소모와 주둔이 용이하며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 서울이나 양평 방면에서 쳐들어오는 적은 구둔치(九屯峙)에서 막고, 원주방면에서 처 들어 오는 적은 송 치(松峙)에서 저지함으로써 시간을 지체할 수 있고, 반격과 대피도 손쉬울 뿐 아니라 군사적 요새로써 의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다. 일본군의 서울, 춘천, 원주 토벌대의 양동 일대 포위작전은 먼저 평해로(平海路)를 확보하여 퇴로를 차 단한 다음, 합세하여 총공격을 가함으로써 양동으로 집결하고 있던 의병진이 서울진공을 할 수 없도록 본 진을 완전 소멸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려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구둔치(九屯峙)는 양평군 지평면 일신리와 양동면 매월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예전에 많은 사람들 이 왕래를 했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양평 을 거쳐 평해까지 이어지는 옛 관동대로였던 큰 길목이었다. 11월 6일 일본군 원주토벌대가 평해로 송치와 판관대동 등에 설치한 초소를 급습해 오자 의병진은 강하게 저항하며 교전하였으나 끝내는 평해로를 적에 게 내어주고 삼산리 의진과 합류했다. 그리고 지리에 익숙한 의병들이 산속으 로 흩어져 게릴라 작전을 펼쳐 토벌대는 평해로만 확보하는데 그쳤다. 삼산리 전투 송치 전투 유적지(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삼산리 송치 일대) 영국 종군기자 맥켄지가 촬영한 양평 의병, 현재 전해오는 사진 중에 유일하게 양평군 삼산리에서 찍은 사진이다. 13도창의군 주둔지 및 전투지(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솔치재와 일신리) 13도창의군 주둔지 및 전투지(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삼산리) 13도창의군 주둔지 구둔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