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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의열단과 「조선혁명선언」 23 「조선혁명선언」에서 주창되고 천 명된바 민족사적 개벽 창도의 혁 명사상은 그렇게 지속적인 영향을 발하며 독립운동의 이념적 지표로 전승되어갔다. 그 소중한 정신적 유산이 8 · 15 해방을 맞고부터는 굴곡진 역사 전개 속에서 오히려 억압되고 잊히어 화석화해버린 듯 했다. 그러다 때로 어떤 격동의 시 점에 그것의 기억이 한 순간 ‘역사 의 천사’처럼 재현했다고도 볼 수 있다. 발포 100주년이 되는 이 시 점에도 ‘선언’의 의미를 돌이켜보 면서 현실에 맞게 재해석해 건설 적인 계승을 기하는 노력이 있어 야 함직하다. 100년 전, ‘조선혁명’의 고고성이 울리다 1923년 1월, 「조선혁명선언」(이하 ‘선언’)이 중국 상하이에서 ‘의열단’ 이름으로 나왔다. ‘한국 근현대의 최고 명문’이 될 이 선언문은 당시 40 대의 단재 신채호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의열단은 “천하의 정의로운 일 을 맹렬히 실행”하겠다는 다짐 아래 1919년 11월 10일 만주 지린(吉林) 에서 창립되었다. 그 결의는 창단 직후부터 7가살, 5당파(當破) 대상의 ‘암살파괴운동’으로 구체화해갔다. 그 거사들은 장쾌한 성공을 거두었 고, 때로 실패가 있더라도 다시 일어나 의열활동이 계속되었다. 의열단의 계속되는 반일투쟁과 과감한 폭력노선을 일제는 ‘흉행’(兇 行; ‘테러’와 같은 의미) 으로 낙인찍고 시종 비난했다. 일부 독립운동자들도 ‘과격 모험주의’라고 꼬집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1922년 3월 중 국 상하이(上海) 황포탄(黃 埔 灘) 의거 때 미국인 여성 여행객 한 명이 유 탄에 맞아 사망한 불상사도 비방의 좋은 구실로 삼아졌다. 때문에 의열 단은 자기의 운동노선을 스스로 변호하고 정당화시켜 안팎의 몰이해와 우려를 걷어내야 했다. 의열단장 김원봉 이 베이징(北京)의 신 채호를 찾아가 선언 문 작성을 특청한 것 은 이런 이유에서였 다고 말해져 왔다. 그 러나 지금 보면 그 이 상의 여러 배경과 이 유가 있었음이 새로 짚인다. 그때 상하이에서 는 독립운동의 방략 설정과 임시정부 문 제를 논하기 위한 국 민대표회의가 막 개 1920년 3월경 폭탄 구입차 중국 상하이 에 가있던 의열단원들. 오른편부터 김원봉 · 강세우 · 곽재기 · 김기 득 · 이성우. 앉은 이는 조력자 정이소이고 하단은 이 듬해 입단하는 김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