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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황에서 황제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중단된다. 1921년 임시정부에 내분이 일어났을 때 선생은 신채호와 함께 조정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세 개의 파 로 나뉘면서 통합은 실패했고 선생은 실망해 임시정부를 떠났다. 그 뒤로는 무정부주의 활동을 펼친다. 1924년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설립에 참여했고 이듬해인 1925년에는 비밀결사 다물단을, 1931년 에는 한·중·일 아니키스트 합작으로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해 의장으로 취임하고 산하에 일제 요인 제거와 기관 폭파를 위한 단체인 흑색공포단을 설립했다. 일제기관 파괴활동을 하는 흑색공포단 지휘 선생이 지휘한 흑색공포단은 일본, 대만, 중국인 등도 참여한 범국가적인 행동단체였다. 흑색공포 단은 경제부, 정보부, 선전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 었는데 정보부와 행동 대원은 1930년에 선생이 조 직한 남화한인청년연맹 단원이 주로 맡고 있었다. 흑색공포단이 가장 처음으로 한 일은 중국 국민 당 내에 있던 친일 그룹 리더인 왕정위 저격이었 다. 그 후 천진과 복건성의 일본총영사관 관저에 폭탄을 던졌고 이어 천진에 군수물자를 싣고 입항 한 11,000톤급의 일청기선에 폭탄을 던져 선체 일 부를 파손하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 1932년 이회영 선생은 활동범위를 넓히기 위 해 만주의 다렌으로 가려고 했다. 당시 만주는 일제의 지배에 있었기에 모두 말렸으나 선생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다렌에 간 선생은 항구에서 일본 경찰에게 잡히고 만다. 조선인의 제보와 일본 밀정의 첩보로 이미 선생이 다렌에 왔다는 정 보가 알려졌던 것이다. 일본 경찰의 고문은 노인의 몸으론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일본 경찰은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 을 숨기기 위해서 감옥에서 자살했다고 발표했으며 증거를 숨기기 위해서 서둘러 시신을 화장했다. 1932년 11월 17일, 선생의 나이 65세 때였다. 이회영 선생의 유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