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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23 ▒ 독립장│양세봉(梁世奉) 친애하는 동지들, 이번 전투는 동포 동지들의 생사를 담판하는 결전입니다. 나를 따라 생명을 각오하는 동지 들 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중략) 조국광복군과 동만 백만 동포들의 생명을 두 어깨에 짊어진 우리는 일당백의 용 감한 정신과 아울러 이번 전투에 승리의 믿음을 선포합니다. - 1932년 초 홍경현 대회전을 앞두고 장군이 연설한 대목의 일부분 - 어릴 적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에 크게 감동 양세봉 장군은 1896년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군은 어려서 가정이 매 우 어려워 근처 서당에서 소사로 일하며 천자문, 동몽선집, 명심보감 등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일제의 침략행위로 의병 활동이 들불같이 일어났고 일본군과 목숨을 바쳐 싸우는 의병을 보고 장군 의 어린 가슴에도 항일 의식이 싹텄다. 특히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일제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 의사의 기개에 경탄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다. 16살이 되던 1912년에 부친이 사망하자 집안 살림을 맡게 된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어 더이상 국내 에서 생활하기가 곤란해 1917년 가족과 같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 영릉에서 중국인의 소작농으로 가 족의 생계를 연명했다. 1919년이 되자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흥동학교 교장 이세일과 함께 주민들을 규합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했다. 그때부터 독립항쟁에 대한 열망이 다 시 피어올랐고 독립항쟁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지낸 독립군 최후의 맹장 사이토 마코토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으며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이 된 후 중국 무장 단체와 연합해 영릉가 전투 등에서 일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 1896년 6월 5일(음력) 평안북도 철산 출생 ● 1922년 천마산대에 가입 무장활동 ● 1932년 조선혁명군 총사령에 취임 ● 1930년 만주지역 최후의 독립군 명장 ● 1934년 8월 12일(음) 만주 대랍 지구에서 피살,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핵심공적 주요약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