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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만주에 설립된 각지 민족학교 교원으로 애국청년들을 양성했다. 선생은 서로군정서의 독립군을 이끌고 수시로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일제의 주재소, 헌병대 등을 습격하고 친일 매국노를 숙청하는 등 활발한 활동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던 중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보복으로 간도의 조선인 마을을 습격해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일본군의 대규모 병력이 간도로 들어오자 독립군들은 남북만주 및 연해주지역으로 이동했다. 대 다수 독립군이 연해주로 옮겼으나 서로군정서, 광복군 총영, 대한독립단, 광복단 등 나머지 독립군 병력은 장백, 안도, 안동, 임강, 홍경 등 남만주 지역으로 이전해 새로운 기지를 세웠다. 선생도 남만 주의 홍경현으로 옮겨 재기를 준비했다. 홍경현의 한인 수는 2만여 명이 넘어 새로운 기지를 건설하 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대한통의부 사령관 겸 군사부위원장으로 활동 1922년 봄 여러 독립군단 대표들이 모여 각 독립군단의 통합 문제를 논의했다. 그 결과 통일회를 결성하고 통합된 대한통군부를 결성했다. 2개월 뒤에는 통군부 설립 때 불 참했던 단체들과 통합해 대한통의부로 재결성했다. 1923년에는 의용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대한통의부의 독 립군을 지휘하게 됐다. 이어 대한통의부 중앙기구로서 군 사적 행정을 총괄하는 군사부위원장직까지 맡아 활동하게 되었다. 신팔균 장군은 지시하고 명령만 내리는 지휘관이 아니라 항상 부하와 함께 훈련하며 지휘관으로서 솔선수 범했다. 통합단체로 결성된 대한통의부는 오래지 않아 신진세력 과 구세력간의 두 개로 분리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 속에 서도 장군을 비롯한 김동삼, 오동진 등 독립군 지도자들은 대한통의부를 끝까지 지키려는 노력을 계속하는 한편 일 제와의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하지만 1924년 7월 2일 야외 군사훈련을 하고 있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 300여 명에게 불의의 기습공격을 당했고 선두에서 지휘하던 장군은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중대장 김하석이 달려들 어 장군을 등에 업고 포위망을 탈출했으나 신팔균 장군은 향년 42세로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조국독립을 위해 항일 무장투쟁을 했던 신팔균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