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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21 가는 조국을 보고 부하 장병들을 이끌고 일제에 대항코자 하였으나 불가항력임을 깨달아 군복을 벗어버렸다. 그 후 충북 진천으로 내려가 청소년의 민족혼을 일깨워주고 항일애국사상을 일 깨우기 위해 사립 보명학교(현 이월초등 학교)를 설립해 교육운동을 전개하는 한 편 각 지방의 의병부대 및 전국 각지의 동료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적극 적인 항일독립항쟁을 준비하였다. 전국 애국청년들을 규합하여 대동청년당을 조직 1909년 애국 동료들과 힘을 합해 대동청년당이라는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근대적 교육을 받 은 80여 명의 애국청년이 참가해 조직한 단체였으며, 국권회복을 위한 지하독립항쟁을 전개하여 광 복할 때까지 존속한 비밀단체였다. 하지만 청년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1910년 8월 마침내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압으로 국권을 빼앗 기는 경술국치를 당한다. 나라의 패망을 지켜본 선생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오직 한가지임을 깨닫 는다. 민족의 남은 힘을 모두 결집해 무력을 키운 다음 일제를 한 번에 처단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그와 같은 힘을 키우고 결속을 지키는 일이 국내에서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고국을 떠나 만주로 망명해 북간도 일대의 대종교 지도자인 서일과 함께 중광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선생은 동삼 성의 민족지도자 39인 중 1인으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 발표하기도 했다. 만주의 각 지역을 다니던 선생은 서간도에 정착한다. 이 지역은 국외 독립항쟁기지를 건설코자 하 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집결하고 있었으며 국경과 가까워 국내외 애국청장년을 모집해 독립군을 양 성하기에 최적지였다. 선생은 이후 한족회 소속의 독립군단인 서로군정서에 가입해 1918년경부터 신흥무관학교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집중한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 3,000여 명을 배출 1919년 3.1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적극적인 독립전쟁을 실현하기 위해 그해 11월 서로군정서 내에 속성 훈련기관을 설치했다. 졸업생 대부분은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만주 내 각 독립군단에 소속 되어 직접 독립항쟁에 참가했고 특히 청산리(靑山里) 독립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일부는 육군 보병 부위인 신팔균 선생을 육군 보병 정위로 임명한다는 대한제국 임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