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page
22page
독립(獨立)을 외치다
22page
홍범식(1871~1910)
홍범식의 자는 성방, 호는 일완, 본관은 풍산이다. 참판 승목의 아들로 충북괴산 출신이다. 1888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1902년 내부주사 혜민서참서를 거처, 1907년 태인군수,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한일병합이 되자 분함을 참지 못하여 조종산에 목매어 자결하였다. 한일병합 때 우리나라에는 360여 명의 군수가 있었으나 정충대절의 절개를 지킨 군수는 금산군수 한 사람뿐이었다.
김용중(1898~1975)
김용중은 1898년 3월 2일 금산읍 중도리에서 태어났다. 식민지 조국에서 갈 길을 찾지 못했던 김용중은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자영업으로 자수성가했다. 1934년 LA에서 송철 박사와 사업하며 독립지사에게 자금을 지원하였고, 신안주보 주필로써 조국의 독립을 주장하고 세계에 홍보했다. 1943년 한국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17년간 “한국의소리”를 발간하여 조국의 독립을 역설하였으며 수십차례에 걸쳐 독립금을 헌납하였다.
22page
양태용(1879~1937)
자 차도, 호 해파, 본관 남원. 효자 의열의 아들. 1910 경술국치를 당하여 할복자결을 기도하다. 미수로 끝난 후 일본정부에 침략항의문을 만국공사관에 독립청원문을 발송하고, 납세반대와 호적반대운동을 전개하다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학대를 받고 1937년 세상을 떠났다. 비가 금산읍 아인리 구름고개에 있다.
유진산(1905~1974)
호는 옥계(玉溪). 본명은 영필(永弼). 진산은 필명이다. 금산(錦山) 출생. 1919년 3.1 운동 때 독립만세 벽보사건으로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자퇴,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를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1942년 만주로 망명, 충칭(충징) 연락원이 되었으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강제 송환되었다. 8.15광복 후에는 청년운동을 시작으로 정계에 투신, 1954년 이래 국회의원에 7회 연속 당선되고 야당의 중진으로 활약하였다. “토론하고 타협하는 것이 바로 정치이다."라는 소신을 피력한 바와 같이 민주정치의 기본을 대화와 타협에 두었던 정치인이었다. 회고록으로 《해뜨는 지평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