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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봉기와 국권수호전쟁┃19 ▶전국 의병진이여! 서울진공작전에 참전하라!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일대는 1907년 10월 20일 이후 전국 각지의 의병들이 집결하여 5천여 명에 달하는 대규 모 병력이 주둔하게 되었다. 경기도 양평군 내의 의병주둔지는 석곡리, 삼산리, 단석 리, 매월리, 석우리 일대로써 양동면의 전역에 마을마다 분산하여 주둔했다. 또한 양동면 계정리와 경계를 이룬 횡 성군 서원면 지역에도 의병의 일부가 주둔하고 있었다. 서울진공 작전에 참전하기 위해 경기도 양주(현 구리시 수택동)로 집결할 의병진 중에 경기 이남의 이 인영, 민긍호, 허위, 전라도의 문태수 의진 등이 양동에 주둔해 있었다. 양동면은 실질적인 13도창의대진 소 창설지이며 서울진공작전의 교두보라고 할 수 있다. 삼산리 전투 최대격전지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삼산리와 분터골 다리 일대) ▶ 호좌의병, 충주성을 점령하다. 1906년 2월16일, 호좌의진은 충주성 점령을 위해 행군을 시작했다. 제천 박달재를 넘어 산척을 지나 북 창에서 남한강 얼음을 타고 강을 건너 충주성으로 진격하였다. 충주지역 농민들까지 가세해 1만 명에 가 까운 부대가 충주성을 향하자, 의병들의 대공세를 미리 알지 못했던 성중에서는 당황하여 성을 지키던 관 군과 일본군은 허둥지둥 전열을 가다듬지 못했다. 김백선은 포수로 구성된 선봉부대를 지휘하여 동문을 넘어 들어가서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치고 성문을 열어 충주성을 점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호좌의진 은 단발을 강요하고 일본군을 끌어들인 죄를 물어 충주부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했다. 충주성 전투는 을미 의 병의 전국적인 확산과 호좌의진의 사기진작에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다. ▶ 충주는 의병의 氣와 忠情이 서린 도시 호좌의진은 충주성을 점령한 다음날부터 관군 과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다. 더구 나 충주에서 가까운 수안보와 영주에 주둔하던 일본군까지 지원군으로 몰려와 공격을 퍼부었다. 1906년 2월 23일, 일본군 수백 명이 성밖 가까 이 공격하여 왔다는 급보를 받은 중군장 이춘영 은 의병들을 지휘하여 격렬하게 전투하다가 적탄 이 얼굴에 명중하여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충주성 전투는 밤낮으로 악전고 투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의병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연일 격전을 벌이며 성을 방어했다. 열흘 이상 계속 된 전투에서 전사자와 부상자가 계속 발생했고, 외부에서 오는 지원도 끊기고, 양식마저 부족하여 의병들 은 3월 5일 철수를 시작하여 청풍으로 들어갔다. 충주성을 점령한지 이십여 일만에 패전으로 끝나고 말 았지만, 을사의병의 의기와 꿈들은 오늘도 충주 관아길에 살아서 숨 쉬고 있다. 충주성 전투 유적지(박달재와 남한강) 양평 삼산리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