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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 순국선 열 독 립 항쟁사 21 이어 ‘군대해산령’을 내려 대한제국의 군대 마저 해산시켜 버렸다. 대한제국군 강제해 산명령이 떨어지자 격분한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 었다. 육군 보병참위 남상덕과 시위대 병사 천여 명은 일본군과 항전을 벌였고, 치열한 전투 끝에 러일전쟁 때 큰 공을 세운 일본군 의 가지하라 중대장을 사살하는데 성공하였 다. 그러나 총기와 탄약이 부족한 대한제국 군은 장교 13명을 포함한 70여명이 장렬히 전사하고, 부상 100여 명, 600여명이 포로가 된 가운데 남은 장병들은 뿔뿔이 흩어져 그중 많은 수가 의병부대에 합류한다. 서울 시위대의 봉기 소식이 전해지자 원주 진위대와 강화 분견대 등 지방 부대 장병들이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나라의 운명이 망국으로 기울었다는 참담함에 스스로 나라를 지키고자 농민뿐 아니라 천민까지도 의병 대 열에 가담하였다. 의병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경 기·충청·강원·황해도의 중부지방, 경상·전라도의 남부지방, 함경·평안 도의 북부지방은 물론, 국경선 너머 간 도와 연해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때 의 의병을 정미의병이라 한다. 정미의병 항쟁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 게 타올랐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 항 쟁에 합류함으로써 체계적이고 조직적 인 활동이 가능해졌다. 근대적 무기를 갖춘 군인이 합류하자 의병 부대의 규 모는 더욱 커지고 조직력과 전투력이 강화되었다. 의병들은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의병을 국제법 상의 교전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하고 스스로를 독립군이라 불렀다. 국제법상 으로 인정받은 대한제국의 정규군으로서 일제와 싸우기 위함이었다. 훈련원에서 훈련 중인 신식군대. 1907년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 을 퇴위시킨 뒤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1907년 의병 부대의 모습. 정미의병은 고종황제의 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확대, 강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