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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라 생각한 선각자들이 많아 국내외에는 수많은 사범학교가 설립됐다. 서일 선생도 그때 세워진 학교 중 하나에서 학생들을 교육했을 것이다. 그의 20대 시절 나라의 분위기는 어두웠다. 조국은 을사늑약과 경술국치 등으로 망국을 향해가고 있었다. 교사로서 후학들을 양성하고 젊은이들에게 투지를 불러 넣고 있었으나 그것으로는 부족하 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결국 계몽과 교육으로는 조국 독립의 한계를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선생의 나이 31세 때 당시 독립 지사들이 많았던 동부 만주지역에서 그의 활동은 교육에 정신과 힘을 결합해 무장투쟁에 나섰다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계몽운동에서 무력항쟁으로 바꿔 독립군 양성 1911년 서일 선생은 동부 만주 지역의 왕청현에 도착했다. 그의 항일투쟁 역사 10년의 시작이었다. 선생은 먼저 한승점이 설립한 대종교 계통의 명동학교에서 한인 자녀들을 가르치며 젊은이들에게 조국독립의 의지를 불붙여 줬다. 1912년에 대종교에 귀의한 선생은 홍익인간의 이념을 추구하고 실 행하는 대종교의 정신을 독립군에게 심어준다. 선생이 단순한 독립항쟁가가 아니었던 이유는 교육 자이자 종교인이며 언론인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젊은이가 만주로 모이자 서일 선생은 북만주 왕청현 덕원리에서 중광단을 조직했다. 중광단 단장에 취임한 선생은 무력항쟁의 기틀을 잡기 위한 체제 구축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대종교의 이 념계승에도 몰두했다. 대종교에 귀의한 사람 중에서 젊은이들은 독립군으로 편입시키고 이외의 교 인에게는 군량조달 등 다른 직무를 부여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중에 선생이 총재로 지휘한 북로군정 서의 장병은 거의 대종교인이었다. 항일투쟁단체 규합 대한군정서 총재로 서일 선생은 교도들을 중심으로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는데 ‘신도 1만 5천 명을 모아놓고 독립군 양 성기금으로 1인 1원씩 거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대종교를 독립항쟁의 기지로 삼았던 것 같다. 당시 선생은 조직한 중광단 등을 통해 대일무장투쟁을 추구했으나 재정문제 등 조직체계가 잡 히지 않아 실제적인 대일무장투쟁은 수행하지 못했다. 이후 실제적인 무장투쟁을 하고자 만주에 흩 어져 있는 수많은 독립단체의 결집을 시도했다. 1918년 김좌진, 김동삼, 신팔균, 손일민, 신채호 등 39인이 ‘무오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독 립항쟁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강도 높은 전투 훈련을 시작했다. 동시에 ‘일민보’, ‘신국보’ 등의 신문을 발간해 “일제와의 항쟁은 혈전을 벌이는 피의 전투밖에 없다”고 주장했다.